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이트 Dec 23. 2015

다섯 살에 가출하다.

내가 처음 가출을 시도한 것은 다섯 살 때였다.


갓난 남동생은 엄마 품에, 언니는 엄마 등 뒤에, 여동생은 아버지 품에서 잠들던 단칸방 시절 나는 잘 곳이 없어서 엄마 발을 안고 잤다.


아무리 어려도 눈치는 있어서 내가 찬밥 신세인 것은 일찌감치 알았던 것 같다.


아! 시작부터 서글픈 내 인생


어느 추운 겨울날 위채에 살고 있는 주인집 아이를 꼬드겨 함께 집을 나가기로 했다.


엄마에게 짐을 싸달라고 하니 어쩌나 보려고 옷 가지 몇 개를 보따리에 대충 싸주신, 나만큼이나 웃겼던 우리 엄마였다.


가난하던 시절이라 양말도 없이 맨발에 나선 길은 바람이 어찌나 세찬지 동네를 벗어나자마자 휘몰아치는 한기에 견딜 수 없어 그만 가출을 포기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짐 싸달라고 큰 소리 친지 두 시간 만에 돌아오려니 창피해서 차마 집으로는 못 들어가고 아이가 가출한 지도 몰랐던 윗집에서 저녁밥을 얻어먹고 있으니 엄마가 데리러 오셨다.


지금도 아스라이 기억난다.


몹시 시렸던 발가락의 느낌과 돌아갈까 말까 망설였던 그 조그만 심장의 떨림. 그리고 어슴푸레하던 윗집의 저녁 먹던 장면들


시도로 끝나버린 가출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나 보다.


아버지가 사랑에 목말랐던 나를 돌아보시고 그다음부터는 내가 받아쓰기에서 백 점을 받아오면 십 원씩 주셨다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두 번째 가출 시도는 밤늦도록 야간자습에 지친 고3 시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엔 밤업소 거리가 있었다.


 <야화>라는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뭇 남자들에게 웃음을 파는 여인이 되어 다른 인생을 살 것 같은 상상도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내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이었을 게다.


여름이 다 가도록 버스에서 내릴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학력고사를 치르고 말았다.


세 번째 가출 시도는 반대하는 결혼을 밀어부치기 위해 남편과 혼전 여행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미리 눈치를 챈 언니가 엄마에게 이르는 바람에 그마저도 실패로 끝나고 아버지에게 모든 문제는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천지 분간도 못 하는 말로 결국 졸라서 허락을 받아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가출은 암에 걸린 뒤 나를 위한 삶을 살아보고 싶어 퇴직금으로 셋집을 얻고 살림살이를 장만해서 가족을 떠나 나혼자 양평에서의 전원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시골의 밤이 그렇게 캄캄하고 무서운 줄 몰랐던 탓에 이틀 밤을 혼자 보내고는 서울로 냉큼 돌아오고 말았으니 나의 가출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봄이 되면 나는 다섯 살때부터 길러진 가출 본능으로 또다시 집을 나갈 것이다.


원래 가출은 날 풀리면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암에 안 걸리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