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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Nov 27. 2017

이웃이 다 하는 김장

우리 집의 김장을 해마다 빠짐없이 해온 지 벌써 십수 년째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보조 역할에 머물러 있었기에 아직도 김장을 할 줄 모른다.

서울로 이사 와서 14년 동안 우리 집의 김장을 책임져주신 분은 같은 아파트 라인에 살고 계신 우리 교회의 구역장이다.

전주가 고향인 구역장은 집밥의 달인이어서 내 손맛에 익숙한 우리 집 아이들조차 "엄마의 음식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말로 내게 등을 돌린 적이 있다.


특히 여름철이면 주부 9단도 어렵다는 열무물김치를 기가 막히게 담아주시기 때문에 아빠를 닮아 미각이 예민한 둘째는 "어쩌면 이런 맛이 나느냐?"며 감탄하면서 먹는다.

특히 작년의 김장은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설이 지나자 김치가 동이 나기도 했다.


구역장이 두어 달 전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올해는 양평에서 김장을 하겠다며 구역장에게 알리고 절임 배추 배송을 양평으로 했다.

양평에는 내가 의지하는 또 다른 손맛의 달인이 있기에 그 이웃을 믿고 꺼낸 말이었는데 도와주러 오겠다고 하신 그분도 일본 여행의 후유증으로 토사곽란이 와서 몸져눕게 되었다.


이쯤 되니 작년에 절임 배추 20kg 세 상자가 부족해서 올 해는 넉넉하게 다섯 상자를 주문해놓은 나는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한 상자에 크고 작은 배추 열 포기가 들어가니 말하자면 오십 포기의 김장을 앞두고 밤에 잠이 안 올 지경이어서 온갖 궁리를 거듭한 결과, 양념은 서울에서 만들고 치대는 건 양평에서 하는 묘안을 내게 되었다.


구역장에겐 양념을 다 해놓을 테니 마지막 간을 봐달라고 염치없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무채만 잔뜩 썰어 놓고 나서 뭐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고춧가루만 무채에 쏟아 넣고 젓갈, 찹쌀죽, 매실청, 갓, 미나리, 쪽파, 불린 청각, 마늘, 생강, 사과와 배 간 것을 거실에 주르륵 늘어놓고는 구역장에게 전화를 했다.

구역장의 지휘대로 이것저것 넣어서 남편이 양념을 치대는 동안 막막하던 김장은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듯했다.


김치통 세 개에 양념을 담고 지난 금요일 저녁, 양평으로 출발했다.

남편과 둘이서 밤이 새도록 치댈 각오였는데 나를 구해주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산새공방의 손영희 선생님에게 함께 손글씨를 배운 동갑내기 이웃 부부가 도와주러 오겠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보쌈고기를 넉넉히 사서 김장을 하기도 전에 수육부터 삶아서 저녁상 차렸다.

때마침 연락을 해온 손 선생님까지 오시고 친하게 지내던 또 다른 이웃 부부도 퇴근길에 도착해서 갑자기 일손이 많아졌다.


세 명의 주부가 두 시간 동안 치대니 열두 통의 김치가 완성되었다.

나는 장갑 안 낀 손으로 배추를 쪼개김치통을 챙기느라 사실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양념이 턱없이 모자라서 결국 절임배추 한 상자는 다른 이웃에게 넘겨주었지만 그래도 사십 포기의 김장을 한 셈이다.

생새우를 넣은 작년보다 맛은 못하게 되었으나 너무 맛있으면 빨리 먹어버려서 적당히(?) 맛있게 해서 오래 두고 먹으려는 내 생각대로 되었다고나 할까?


보기보다 소심한 나는 직장에 있을 때도 내 부서의 일을 다른 동료에게 부탁하는 것을 못해서 관리자의 충고를 받기도 했다. 남에게 도움도 요청할 줄 알아야 한다며 상사는 나를 대신해서 다른 부서로 업무를 분산해주기도 했다.  

이번에도 먼저 소매 걷고 도와주러 오는 고마운 양평의 이웃들 덕분에 많은 양의 김장을 무사히 해낼 수 있었다.

바빠서 혹은 혼자 있다고 김장을 못하는 분에게 두어 통을 드리고 나머지로 일 년 동안 두고두고 묵은지까지 먹으려고 욕심껏 김장을 하고 나니 마음은 만수르가 부럽지 않다.


이력서를 넣은 구직은 보기 좋게 떨어졌다.

지원 마감일에도 이메일의 수신확인이 안 되어서 전화까지 했으나 결과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남편은 식당 설거지라도 해서 가계를 돕겠다는 나의 의지에 손사래를 치며 질색했으나 이력서를 넣었다는 내 말에는 궁금증이 폭발하여 어디다 넣었냐며 크나 큰 관심을 보였다.

남편은 평생 돈을 벌어오던 아내가 집에서 놀고 있으니 말로는 체력이 안되는데 어떻게 나가서 종일 일하겠냐고 말하는 폼이 아마도 격일 근무나 반일 근무라면 찬성할 태세다.   


당분간은 전업주부로 국이나 열심히 끓이며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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