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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Jan 17. 2018

다섯 살 내 인생

5년 전 오늘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너무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뒤늦은 후회와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어리석음에 하루 종일 눈물이 나왔다. 수술하고 나서 회복하면 오직 나 자신을 위하고 기쁘게 즐기면서 살아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며 마취주사에 의식을 잃어갔다.


몸을 회복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일 년간의 항암 후, 꿈꾸던 인생을 살기 위해 실행에 들어갔다. 진단금으로 양평에 땅을 사고 퇴직금으로는 셋집을 얻어 전원생활을 꾸리기 시작했다. 막상 살아보니 시골의 밤은 상상보다 무서워서 도저히 나 혼자 지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낮의 적막은 즐길만했으나 밤의 어둠과 고요는 무서운 공포로 다가왔다. 남의 집이 아니라 내 집이면 훨씬 덜 무서울 것 같아서 마침내 집을 짓기로 했다. 남편의 반대와 돈의 압박이 있었지만 한번 먹은 마음을 되돌릴 수 없어서 첫 삽을 뜨고 나니 그럭저럭 남편의 마음에도 흡족한 집이 지어졌다.  


흙을 만지며 농작물을 키우는 경험은 힘들게 살아온 내 인생에 확실한 보상을 해주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람에 치인 마음을 어루만져주었고 꾸밀 필요가 없는 소박한 시골 생활은 한없는 만족을 안겨주었다. 해 질 녘이면 백운봉의 노을을 보며 돌고 돌아 먼 길을 달려온 내 삶을 생각하느라 어두워지도록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암에 걸리기 전에는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던 삶이라면 이제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걸 내려놓으니 그 홀가분한 기분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새털같이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은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분이었고 무엇보다 가장 크게 바뀐 점이라면 과거의 나는 자신을 미워했는데 이젠 내가 좋다.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되었지만 암 카페에 주왕 아빠라는 분이 나를 처음 보고 "은혜가 얼굴에 줄줄 흐른다."라고 했을 정도로 나는 정말 감사와 은혜에 충만한 삶을 살았다. 기쁘고 벅찬 삶을 선물 받고 마치 간절히 원하던 장난감을 받아 든 어린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즐거워했던 다섯 살 내 인생이었다.


많은 암환자들은 빨리 5년이 지나서 완치 판정을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재발이나 전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예전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구속 없이 편하게 살던 시절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암도 이제는 만성 질환으로 여기며 평생 관리해야 하는 질병이므로 건강에 해로운 습관에서 멀어져야 하는데 사람이다 보니 고무줄처럼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어찌나 강한지.. 나부터 엄격한 식이 조절에서 느슨해진 것이 사실이고 뭐든 감격하던 마음도 많이 가라앉았다. 쇼핑을 끊었고 가진 옷을 나눠줬는데 다시 소유욕이 살아나고 있는 걸 보니 나쁜 습성은 떨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걸 실감하는 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암 카페에 몇 년 동안 글을 써오다가 그만두어야 함에도 미련을 못 버렸는데 카페 분위기가 신규 회원 위주로 바뀌다 보니 저절로 글쓰기를 접게 되었다는 점이다. 시답잖은 글을 쓰고 회원들과 댓글을 주고받으며 꽤나 즐거웠기에 그만두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겨울은 암환자들에게 힘든 계절이다. 등산이나 걷기 등 야외운동을 하기가 어렵고 체온이 낮아지다 보니 몸의 면역력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도 몸의 기능이 전체적으로 약해져서 찬바람이 불면 기침이 나고 미세 먼지가 심한 날에 나갔다간 몸살 기운에 몸져누워야 한다. 글도 쓰지 않고 외출도 못하면서 보내는 이 겨울이 그래서 힘들다.  


지난 오 년 동안 사귀었던 정든 회원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남은 사람이 얼마 없다는 냉혹한 현실에 새삼 살아 있는 나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며 남은 생을 보내야 하는지 고민이 남는다. 꼭 무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하는 일이 없는 무위한 일상은 5년 완치까지 만이라고 생각해왔기에 모두가 새로운 학년이 되어 출발하는 새봄이 오면 나도 여섯 살 내 인생을 새로이 꾸려야 하기에 이 겨울이 지나면 나도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한다.


울산에 사는 여동생의 외동딸이 3년을 하루같이 열심히 공부하더니 서울에 있는 여대에 수시 합격을 했다. 우리 집 첫째와 동문이 된 셈인데 첫째는 목표했던 그곳에 합격하기 위하여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며 죽을힘을 다했기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울산여고 이과 수석으로 졸업한 조카는 더 좋은 대학을 노릴 법도 해서 약간은 서운한 듯했다. 어쨌든 여동생은 입시를 통과하면 다 같이 여행을 가자고 말해왔기에 나와 우리 집 둘째는 베트남 다낭으로 3박 5일의 여행을 다녀올 것이다. 직장 생활할 때는 시간이 없어서 못 가던 여행을 이제는 돈과 체력이 없어서 못 간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는데 여동생이 비용을 지불해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미세먼지에 답답한 서울을 벗어나 따뜻한 곳에서 즐겁게 지낸 다음에 암을 극복한 내 삶의 새로운 판을 짜 봐야겠다. 일단 떠나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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