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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Mar 12. 2018

보랏빛 냉이를 기다렸다.

빨간 매자나무 열매

시골의 봄은 냉이가 시작이다. 땅에 납작 엎드려 붙어 있는 보라색 냉이를 캐기 시작하면서 바야흐로 본격적인 봄 재미가 시작되는 것이다. 지난 주말에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던 냉이였다. 시누이가 티브이에서 냉이가 올라온 걸 봤다며 시골 가면 냉이를 캐오라는 부탁을 했다. 식초물에 담그면 흙냄새도 없어지고 흙이 잘 떨어진다는 정보를 봤다면서 꼭 캐오라는 말을 덧붙인다. 지난 연말에 시골집에서 골절을 입은 후 아직까지 걸음이 자유롭지 못한 시누이다 보니 봄 향기가 그리운 모양이었다.


시누이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이번 주말에는 냉이가 올라왔나 안 그래도 살펴볼 참이어서 우리 집 옆 농장으로 내려가 땅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보라색의 냉이가 촘촘하게 올라와있다. 겨울 동안 뿌리로 영양분이 모여있는 지금이 가장 약성이 좋을 때라 남편과 서둘러 캐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뿌리가 거의 오십 센티 정도로 긴 것도 있어서 깜짝 놀랐다. 냉이를 처음 캐보는 남편은 이게 맞냐고 내게 여러 번 물어가며 부지런히 캤다. 농장의 주인 어르신과도 잘 아는 사이니까 남의 농장에서 냉이를 캐고도 남편은 잘 덮어야 한다며 발로 흙을 다졌다. 따스한 봄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향긋한 냄새가 나는 냉이를 올해도 캘 수 있으니 퍽이나 이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보라색 냉이의 모습이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매화가 필 즈음인 이맘때였다. 봄이 시작되고 꽃이 피려니까 한 마리 나비처럼 고단한 육신을 벗고 훨훨 날아가신 듯했다. 시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일 년 정도 누워 계시다 이렇게 살아 뭐하겠냐는 한탄을 남기시고 칼칼한 성품답게 생을 마감하셨다. 나를 양평으로 이끈 아름다운 동행의 회원인 딩이도 삼 년 전 이맘때 세상을 떠났다. 언니와 남편의 지극한 병구완을 받으며 동행에서 사랑도 많이 받았던 딩이였는데 그때만 해도 나는 이렇게 많은 죽음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골집에 다녀간 어여쁘고 재주 많은 회원들이 하늘의 별이 되고 나니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다는 게 망설여졌다. 잘 버티던 마리아까지 봄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마침내 떠나고 나니 추억과 그리움은 함께 했던 시간만큼이나 깊었다.


음식 솜씨 좋고 그릇 좋아하던 마리아는 항암약을 비타민 먹듯이 그렇게 강단 있고 야무졌는데 조그마한 체격에도 주방에서는 펄펄 날아다니며 번개 같은 솜씨로 요리를 만들어내곤 해서 어디서든 마리아만 나타나면 아무 걱정이 없었다. 상병과 함께 마리아의 발인과 화장까지는 봤으나 장지까지는 따라가지 못하고 시골집에 와서 냉이를 캐고 앉았으려니 쑥을 엄청난 속도로 캐던 마리아의 생각이 나고 찬장의 그릇을 꺼내려다 이 그릇을 모두 마리아가 줬는데 싶어서 손길이 멈추어졌다. 허망하고도 허망할 따름이었다.


따스한 봄이 다시 찾아왔다.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사람은 늘 봄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고 보니 이 봄이 그저 오는 봄이 아닐 수밖에 없다. 냉이를 캐서 먹는다는 단순한 일이 긴 겨울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고 시골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마음 편히 캘 수 있다 보니 흙바닥에 붙어있는 조그만 냉이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시누이가 캐오라고 했으니 남편에게 큰소리 탕탕 치면서 밖에서 물로 깨끗이 씻으라고 하고 나는 쑥이 나왔나 보러 갔더니 아직 나오진 않았다. 냉이, 쑥, 달래 이런 순서인데 나이가 그냥 먹는 게 아니듯 제철마다 봄나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커다란 재미와 행복을 느낀다. 예전에는 당연히 몰랐던 것이지만 이제는 철따라 느끼는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냉이를 캘 때는 잡초제거용 호미를 쓰면 편하다.


시누이 집에 냉이를 가져다 주니 냉이 튀김을 해서 내게 접시째 내밀었다. 몸에 좋은 것이니 나더러 많이 먹으라고 한다. 솜씨 있는 사람이 무쳐주고 튀겨줘야 먹는 게으른 사람이다 보니 나는 된장찌개에나 넣어 먹을 요량으로 한 줌만 덜어놓고 시누이에게 다 가져왔다. 올해의 냉이 이것으로 마무으리.


월동 시금치가 올라왔다. 작년 가을에 마지막으로 깍은 잔디를 덮어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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