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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Apr 11. 2018

전업주부입니다만 대충 삽니다.

손바느질로  만든 티매트

처음 살림을 배울 때부터 잘못 배웠다. 칠순의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출근하며 아기까지 키우자니 뭐든 빨리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기 때문에 나는 안 그래도 급한 성격인 데다 번갯불에 콩을 볶는 경지까지 올랐다. 퇴근하면 옷도 벗지 못하고 가스레인지 손잡이 두 개를 동시에 비틀어 켜면서 저녁 준비를 이십 분만에 해내어 시어머니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시어머니는 나처럼 성격이 불같아서 굼뜬 걸 못 보시는 분이라 빠르게 하는 나의 살림 솜씨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꽁지에 불이 붙은 닭처럼 푸드덕거리면서 집안일과 직장일을 귀가 윙윙 울리고 등줄기가 욱신거렸지만 잘 한다는 칭찬에 힘든 줄도 모르고 해도 해도 끝나지 않던 일들을 열불 나게 하면서 살았다.



그렇게 살림을 배웠그 후로도 이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집안일을 돌보느라 여전히 빨리 하다 보니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일이 몸에 척척 붙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직장 동료의 집에 가보면 그릇이나 이불 등 살림살이를 제대로 갖춰 놓고 사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적으니 일단 관심이 없고 살림을 매만지고 있을 여유도 없거니와 쇼핑을 해도 입고 나갈 옷이나 핸드백이 더 중요했기에 다들 나처럼 짝이 안 맞는 그릇과 세트가 아닌 이불을 대충 덮고 살았다. 나는 집안일을 좋아하기라도 했지만 동료들은 집들이보다는 개학이 낫다며 손님 초대를 무엇보다 무서워했다.



음식은 맛만 있으면 되고 인테리어는 청소하기 편한 게 제일이라는 신조로 여태껏 살아왔는데 뜻하지 않게 전업주부의 대열에 껴보니 이건 직장 업무보다 더 난감한 세계가 펼쳐졌다. 그릇, 인테리어, 수납, 요리, 손바느질, 화초 가꾸기 등 각 분야의 고수들은 지천으로 널렸고 그들의 눈으로 본 나의 살림은 살림이라고 차마 이름 붙이기도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으니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바꾸기는 불가능하고 그저 겸손한 척 모자란 척 살 수밖에 없다.



접시가 그렇게 비싼 게 많고 찻잔이 그토록 화려한 게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손님을 초대하면 음식에 어울리는 그릇을 사람 수에 맞게 통일해서 차려내고 아름다운 장식을 하는 줄도 몰랐다. 나에게 그릇이란 먹고 나서 바로 뚜껑 닫아 넣을 수 있는 투명한 밀폐용기가 최선일뿐, 어쩌다 손님이 와도 제대로 된 그릇은 가지고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먼지 앉는 게 무서워서 장식품을 두지 않고 살았는데 잡동사니를 싹 치우고 아예 아무것도 놓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손바느질로 직접 만든 작품이 주는 아기자기함은 비싼 명품보다 훨씬 내 마음을 감동시켰다.  



이런 걸 보신 적이 있나요? 말린 연밥 속에 손으로 일일이 끼워 만든 작품을 선물받았답니다.



은퇴하고 와서 양평의 전원주택에 사는 주부들은 나 따위 허접한 솜씨는 비교가 안 되게 살림의 고수들이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내공을 쌓고 와서 그런지(외국에서 지내다 온 분들도 많다.) 모든 게 똑 부러지고 못 하는 게 없는 실력들을 뽐낸다. 살며시 한숨이 나오지만 어쩔 것인가! 따라 하려야 할 수도 없고 그저 감탄을 보내는 걸로 나의 맡은 소임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 공부를 매우 잘 하던 분들 이어서 모범생 특유의 성실 근면함이 몸에 밴 것인지 대충 하는 법이 없이 완벽하고 깔끔하게 집 안팎의 일을 한다. 여기서 또 한 번 한숨!



전원주택에 사는 사람으로는 나이도 젊은 축에 들고 가진 것도 없는 우리 부부는 내세울 것이 없다. 잘 하는 것도 없다. 텃밭과 정원을 가꾸고 사는 모습이나 집안 살림이나 그들과 비교하자면 부족한 것 투성이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웃으며 대화에 맞장구치고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다. 뭘 잘 모를 때는 손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밥도 자주 해서 먹였는데 그럴듯한 그릇도 없고 대접할 만한 요리 실력도 없다는 걸 알게 되어 이젠 누굴 오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다. 시골 살림이 그렇지 뭐 별게 있을까마는 요즘은 너나없이 사람들의 안목이 높아져서 큰일이다!



이젠 빨리 한다고 칭찬해주시던 시어머니도 안 계시고 분초를 다투며 시간에 쫓길 일도 없는데 습관이 되어버린 대충하는 솜씨로는 어디 가서 전업주부라고 말도 못 꺼낼 처지가 되어버렸다.



성격은 여전히 급해서 어제 둘째 딸이 갑자기 내리는 황사비를 피하려 비닐우산을 쓰고 현관으로 들어오길래 다짜고짜 "또 우산을 산 거야?"라고 묻고는 둘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아이구 내가 못 살아!"이러면서 펄펄 뛰었다. 둘째는 "그게 아니라 아르바이트하는 매장 창고에 있던 걸 쓰고 왔어."라고 대답해서 식구들이 빵 터지며 나를 비웃었다. 나는 창피하기도 하고 집에 넘쳐나는 게 비닐우산인데 산 게 아니라니 안심이 되어 소파에 엎어져서 한참 동안 웃었다. 웃다 보니 암에 걸리고도 바꾸지 못한 내 성격이 나도 기가 막힌다.



이젠 급할 일이 하나도 없으니 차분히 주부의 길을 걸어가 보겠어요.







튜울립과 작은 꽃은 크로커스


텃밭을 손질해서 이제 심기만 하면 된다.

  

가시오가피 나무를 얻어다 심었다. 왼쪽의 초록잎은 방아이고 오른쪽은 머위




이것이 우리집 상차림. 달래 부추 원추리 시금치는 모두 직접 뜯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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