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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Nov 15. 2018

이백 평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350평이던 땅을 나누어 150평을 사서 집을 짓고 농사를 두 번 지었다. 그동안 나머지 200평의 옆 땅은 사과나무가 심어지고, 땅을 살 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잡초만 수북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드디어 오늘 땅이 팔렸다. 그 땅을 산 사람은 양평의 우리 집에 여러 번 놀러 왔던 예전의 직장 동료이다. 남향으로 볕이 따뜻하게 드는 우리 집이 좋다고 하면서 깔끔한 성격답게 놀러 오면 집안 청소까지 싹 해주니 이웃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분이다. 나는 백수로 논 지가 벌써 6년째이지만 동료는 아직 현직에 있고 은퇴하려면 몇 년이나 더 있어야 하기에 당분간 집을 짓지는 않을 거라니 옆 땅을 관리하는 건 이제 남편과 내 몫이 되었다.


농사 경력은 5년쯤 되지만 손바닥만 한 텃밭이었는데 이제 이백 평이라는 광활한 땅이 내년 봄부터 우리의 손을 기다린다. 어설픈 농사라도 수확하는 재미를 보고 나니 넉넉한 땅에다 푸지게 심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옥수수나 호박, 콩 같은 작물을 많이 심고 마늘이나 양파 농사도 짓고 싶어 졌다. 감자나 고구마 같은 건 좀 넉넉히 심어야 나눠먹기 좋은데 늘 콧구멍만 한 땅에 옹기종기 심어먹자니 아쉽던 터에 마음대로 심을 수 있는 땅이 생긴 건 설레고 좋다.


하지만 묵직한 부담이 가슴을 눌러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밭 가장자리에서 뻗어 나오는 칡을 없애다 못해 내버려 두었더니 사과나무를 친친 감고 올라가는 무서운 칡덩굴과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는 온갖 억센 잡초를 지난여름에 두고 보지 않았는가.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동네 어르신들처럼 새벽부터 일어나 밭에 나가고 저녁까지 풀을 뽑아야 남이 보기에도 가지런한 밭을 가꿀 수 있다. 하지만 비실거리는 남편과 나의 체력에는 열 평도 안 되는 우리 집 텃밭 수준이 딱 맞는데 욕심은 자꾸 생기고 또 지저분한 꼴은 두고 보는 걸 괴로워하는 소심함이라니!


손이 비교적 덜 가는 작물 위주로 심고 잡초는 쉬엄쉬엄 뽑아주다가 그도 안되면 풀과 함께 크는 자연농법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비닐 멀칭은 하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그랬듯이 되는대로 하는 농사로 하겠지만 밭을 괭이로 갈아서 이랑을 만드는 일부터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넓은 땅이 생겨서 좋다가도 부지런하지도, 체력이 좋지도 않은 우리 부부를 생각하니 한심한 생각부터 든다.




이렇게 이백 평 밭을 나 혼자 갈아엎었다가 잡초에 우거졌다가 하면서 꿈에 부풀어 흥분된 마음으로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았다. 땅주인 지적도를 떼어보니 밭이 이백여섯 평이라는 황당한 얘기를 지인으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다. 계약할 때 전화 상으로는 이백 평이 약간 넘지만 이백 평으로 하자는 얘기까지 주고받았다는데 동료는 이미 이백 평의 값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보낸 상황이기에 어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편과 주변 사람들 얘기로는 서류에 있는 땅이니 땅값을 더 주는 게 맞지 않느냐고 했는데 동네 부동산에 물어보니까 한번 계약이 되었으면 그걸로 확정이라고 했다. 설령 밭이 이백 평이 안 되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니 계약서를 썼든 구두로 했든 상관없이 계약금이 지불되었으면 상황은 끝난 거라는 답변을 들었다.


땅주인의 과실로 계약금의 두 배를 물어주는 것보다는 여섯 평의 땅값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계산을 끝내고 나니 더 이상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부동산을 거치지 않고 지인을 통해 땅 주인과 직접 계약을 한다는 것이 이런 변수가 생겼을 때엔 해결하기가 쉽지 않고 부동산에서 중개료를 그냥 버는 것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시골 땅은 특히 수수료가 비싼 이유도 납득이 간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사실 계약이 될지 안 될지 아직까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백 평의 밭을 일구어야 할지 내버려둬도 될지 안갯속이 되었다. 농사를 더 많이 짓고 싶은지 아니면 사람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잡초가 더욱 무서운지 내 마음도 오락가락한다.   




만약 시골집이 없었더라면 나는 무엇을 하면서 긴긴 세월을 보냈을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변해가는 텃밭과 꽃밭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딱히 하는 일 없는 도시에서와는 달리 시골에 오면 여기저기 손 볼 곳이 있어서 보람 있고 즐거웠다. 늘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시골집이지만 서울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주말에만 잠깐씩 지내다가 오니 더 아쉽다. 연말에 첫째가 미국의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가하느라 집을 떠나고 나면 둘이서 죽이 잘 맞는 둘째와 남편을 서울에 두고 나는 본격적인 시골 생활을 꾸리려 마음먹고 있다.


건강을 되찾고 나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아직까지 그 일이 무엇인지 찾지 못하고 있다. 도시에서 나의 존재는 지극히 미미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시골에서는 아직 새댁에 가까운 풋풋한 청춘인데 도시에서 오십이 넘으니 전철에서 노약자 석도 노려볼 만하게 되었다. 외출했다가 늦은 밤에 돌아오는 길이 아주 피곤할 때는 젊은 사람들은 근처에 오지도 않는 노약자석에 슬그머니 앉기도 한다. 혹시라도 어르신이 시비를 걸면 배에 길게 난 칼자국을 보이며 '아만자'라고 할 배짱 정도는 가지고 있다.


오늘은 수능일이다. 학교에 있을 때 수능 감독을 세 번 정도 했는데 정말 힘들고 고단해서 매년 수능일이 돌아오면 이젠 감독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늘 기쁘다. 감독하다가 쓰러지면서 턱을 다친 교사가 나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던 선생님이었는데 가냘픈 몸에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다음날 턱에 거즈와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나서 온 교무실의 걱정을 샀던 도덕 선생님이 생각난다.


농사꾼으로서 나의 능력은 과연 어떨지 내 땅도 아닌 이백 평의 밭을 두고 본격적인 농부의 꿈을 키우며 오늘 밤도 꿈속에서 열심히 호미질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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