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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Oct 16. 2018

내게 시골집이 주는 의미

도로변에 있는 서울의 아파트는 생활하기에 딱 적합하다. 3호선의 종점 역이 2분 거리에 있어서 아이들은 강남으로 나들이 가기 좋다며 낡아빠진 아파트지만 이곳 사는 동안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삼십 년이 다 된 아파트라서 지난 태풍 때 내린 비가 부엌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와 세 군데나 물받이를 받쳐둬야 했다. 좁은 기역자 부엌은 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면 개수대도 있고 가스레인지가 있어서 일하기는 그만이다. 다 커버린 아이들에겐 좁고 낡은 아파트가 집안일에는 최적화된 공간이랄까? 이곳에서 가족들을 위해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 것으로 주부의 하루가 채워지는 곳이다. 식구들이 모두 빠져나간 오전에는 커피 한 잔 옆에 놓고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이 있지만 서울의 아파트는 주로 가족들의 의식주를 돌보는 곳이다.



시골의 작은 집은 휴식과 만남의 공간이다. 사무실과 현장을 오가며 일하는 남편은 주말에 마당이 있는 시골집에서 자고 나면 무거운 머리가 거뜬해진다고 한다. 점점 일하기 싫어지고 시골에서 놀고 싶어 지는 것이 문제라고도 했다. 도시의 소음에 괴롭던 귀가 조용한 시골에 들어오면 평안해지고 초록 초록한 풍경은 눈부터 마음까지 시원해져서 자꾸만 머물고 싶어 지는 것이다. 원래는 나의 투병 생활을 위해 지은 집이지만 지금은 주말의 휴식과 놀러 온 지인들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에 시골에서 새로운 이웃들을 사귀는 일도 보태졌다.

시골 집에 놀러 온 암카페 회원들과 산새공방에서 찍은 사진



 은퇴하고 전원생활을 하러 온 이웃들에게는 남편과 아내 중에서 누가 먼저 시골 가서 살자고 옆구리 찔렀는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시골 생활은 만만치 않아서 집 안팎으로 해야 할 일이 철마다 차곡차곡 쌓이고 때를 놓치고 나면 낭패하는 일이다 보니 먼저 시골 가서 살자고 한 사람이 이럴 때 불리하다. 가을걷이를 해야 하고 겨우살이를 준비해야 하는 지금이 부지깽이도 설치고 다닌다는 바쁜 철인데 손 놓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이 바빠 정신없는 사람이 한 집에 살아야 하니 일이 많다는 것은 싸울 일도 많다는 뜻이다.



우리 집도 내가 시골에 가겠다고 서둘렀으니 고구마를 서리 내리기 전에 캐야 하는 건 내 몫이 된다. 겨우 오십 포기를 심었는데 호미질로 캐다 보니 팔이 아프고 길지도 않은 이랑이 멀게만 보였다. 몇 차례에 나누어 쉬엄쉬엄 캐고 나니 거의 다 했을 때쯤 남편이 장화를 신고 나타났다. 고작 서너 포기를 캤지만 이웃집 남편같이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일손을 거들었으니 어쨌든 대견하다.


첫 고구마와 마지막으로 캔 땅콩


이번에 양평 지역 모임이 새로 생겨서 나도 참여하기로 했다. [시를 사랑하는 모임]으로 양평 지역 사람들이 모여 매주 시집을 한 권 정해서 시를 읽으며 사는 얘기도 나누는 <시사모> 모임인데 시를 읽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끄는 대로 덜컥 참석을 했다. 모르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이며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것이 그동안 암 카페 활동을 하면서 여러 회원들을 사귀어 본 경험이 준 선물이다. 오랜 직장 생활을 했지만 울타리 안에서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고 살아오다가 생판 다른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보니 내가 얼마나 좁게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살아온 인생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처음 만나는 자리이니 자기소개의 시간이 있었다. 첫인상부터 나이와 직업으로도 어떤 사람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는 눈치 정도는 생기는 나이들이라서 한눈에 호감이 가는 사람들로 보였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우스개를 시작하며 내 소개를 했다. "제 인생에는 세 남자가 있어요. 남편은 마지막 세 번째 남자가 자기인 줄 알고 있지만 지금 대통령이 첫 번째 남자이고 우리 교회 목사님이 두 번째입니다. 제 인생의 세 번째 남자는 평생의 꿈을 이루어주신 제 집을 지어준 저분입니다."라고 하면서 산새 공방 카페의 주인이자 건축가인 교수님을 지목했다. 반응은 뜻밖에도 아주 뜨거워서 다들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세 번째 남자로 소개된 교수님은 "제가 세 번째 남자입니다."라며 나의 유머를 받아주셨다.


시사모 모임의 모습


병에 걸리고 모든 걸 내려놓고 나니 사는 게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세상 욕심을 다 던져버리고 그냥 살아 있는 것이 고마울 뿐인 환자가 되고 나서야 삶은 비로소 내게 행복을 허락했다. 손잡히지 않는 미래로 괴로 청춘에는 김승희 님의 시만 읽었는데 이제는 자연과 함께 편안해진 마음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 박사'들과 함께 읽기 편한 시들을 다시 감상하는 포근한 모임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 모임에서 읽은 시를 소개한다.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살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 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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