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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Apr 12. 2019

수선화가 마침내 핀 아침

오늘 아침에 드디어 노란 수선화의 꽃봉오리가 벌어져 예쁘게 피었다. 꽃샘추위가 길었던 탓에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던 꽃들이 마침내 피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꼭 다물고 있던 벚꽃도 분홍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고 그 이름도 어여쁜 내 사랑 앵초가 보랏빛 꽃대를 밀어 올렸다. 단정한 잎사귀의 튤립은 며칠 더 있어야 꽃을 볼 것 같다. 꽃 모양이 꼭 마스카라처럼 생긴 무스카리도 수줍게 꽃을 피웠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는 처음엔 잎이 먼저 져버려 죽은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는데 작년보다 무성해진 잎을 보니 7월엔 꽃대가 제법 많이 올라올 것 같다.


길가의 돌담 아래에는 제비꽃과 붓꽃, 그리고 금낭화를 캐다 심었다. 패랭이꽃도 심고 싶은데 씨를 발아시키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서  고민 이다. 마당으로 눈을 들면 매화와 살구나무가 연분홍 꽃잎으로 나풀거리고 앵두와 사과나무에도 꽃망울이 곧 터질 듯하다. 바야흐로 봄의 잔치가 시작되었으니 당연히 서울 집을 잊고 여기 시골집에서 지내고 있다. 첫째는 외국에 가 있고 둘째도 출근을 시작해서 집에 가봐야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지난겨울 동안 쓸쓸하고 심심한 시간을 보내느라 무척 힘들었는데 봄이 찾아오니 내 미음에도 햇살이 비춰 들기 시작한다. 서울에서는 늘 시무룩하던 내가 시골에 와서 종달새처럼 명랑해지자 남편도 불평 없이 아내 없는 퇴근을 견디고 있는 중이다.


어젯밤에는 시골집의 낭만을 제대로 즐겼다. 블루투스 스피커의 음량을 최대로 하고 새벽까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떠나보낸 옛사랑을 추억하니 마치 스무 살 남짓이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감성이 들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어쩔 줄 몰라하던 그 절절한 마음이라니! 내게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이어졌던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과 우정 사이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손도 한 번 못 잡아보고 보낸 그 사랑이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저릿저럿 심장이 아파온다. 물론 이젠 크게 울리는 음악이라도 있어야 가능해지긴 했지만 내 인생에 이런 사랑이 있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주변에 가끔 첫사랑과 결혼한 사람을 보긴 했는데 비가 오거나 슬픈 음악을 들을 때 추억할 사람이 남편밖에 없다면 아마도 그건 견딜 수 없이 무미건조한 일이지 싶다.


아파트라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 시골집에서는 마음껏 누려도 되니 한밤 중에 못을 박거나 청소기며 세탁기를 돌리는 일도 습관처럼 깜짝 놀라면서 하게 된다. 소리소리 지르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쿵쿵거리는 음악도 걱정 없이 듣는다. '그래, 이 맛에 시골 살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 때이다.


할 일을 찾아서 하자면 끝도 없는 것이 시골집이라서 내일은 무슨 일을 할까 궁리를 거듭하며 작업을 구상하고서야 잠이 든다. 오늘은 꽃밭을 손보는 걸로 오전을 보내고 들어와 글을 쓰고 있다. 잡초가 벌써 올라오고 있어서 오후에는 황토방 뒷꼍으로 가는 길에 제초매트를 깔고 바닥돌을 깔아서 풀을 막는 작업을 해야 한다. 모종은 다음 주나 되어야 하나로 마트에서 판다고 해서 밭을 다 갈아놓은 지금은 아직 여유가 있는 편이다.


봄부터 시작되는 마당일부터 꽃밭과 텃밭 가꾸기는 규모가 작아도 할 일이 끝없이 이어진다. 주변엔 집 마당이 천 평 가까이 되는 이웃들도 있는데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그 일을 어찌 다 하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주말 주택이기 때문에 놀이처럼 하는 일인데도 힘에 겨워 허덕이는데 그 넓은 땅을 관리하자면 부부가 싸울 수밖에 없을 듯하다. 고된 일을 하면 지치기 때문에 서로 날카로워지고 일하는 방식을 두고 다투게 된다. 우리 부부가 일을 크게 벌이지 않는 이유도 체력에 넘치는 일을 하면 반드시 아웅다웅 싸우고 씩씩거리기 때문에 뭐든지 조금만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안 하려고 한다. 그러니 이웃들이 보다 못해 거들거나 뭐라도 심으라고 주면 그제야 움직인다. 우리 부부의 시골 생존 전략인 셈이다.


시골집에서 연둣빛 나무 이파리 자고 나면 터지는 꽃망울을 보면서 겨울 동안 울적했던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다. 매화 향기가 산뜻하고 꽃잎은 보고 있노라면 말 그대로 눈이 부시다. 힘은 들지만 흙냄새를 맡으며 밭을 갈고 잡초를 뽑으며 올 한 해도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시골집을 짓고 두 집 살림을 하느라 내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지만 그래도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을 들게 하는 게 꽃이고 나무이다. 잡초며 흙이다.


잡초!

근데 넌 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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