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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May 13. 2019

모종 입장에서 생각하기

오이 모종을 심을 때는 처음에 물을 좀 주고 한동안 안 주거나 약간만 줘야 한다. 오이가 물을 좋아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홍수가 나도록 물을 주다간 오이 줄기가 녹아서 고꾸라지고 만다. 뿌리가 활착하고 난 다음에는 물을 넉넉히 자주 줘야 한다. 물이 부족하면 오이에서 쓴 맛이 나기 때문이다. 배양토에 담겨 따뜻한 하우스 안에서 자라다가 하루아침에 텃밭으로 옮겨져 일교차가 심한 변덕스러운 봄 날씨와 무지한 주인이 마구 뿌려대는 차가운 물세례에 견디지 못한 우리 밭의 오이 모종은 차례로 사라져 갔다. 같은 날 심은 토마토나 고추는 냉해를 입어도 그럭저럭 버티는 중이었는데 유독 오이만은 모종 상태에서 지켜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주변 이웃들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다들 오이 모종을 추가로 사러 가니 농협에서 모종 파는 아주머니가 저런 비을 알려주셨다.


오이가 맥없이 축 늘어지는 이유를 알고 나니 환경의 변화에 적응도 하기 전에 홍수를 겪은 셈인 오이가 이해되었다.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고 낮에는 햇볕이 뜨거우니까 오이 모종에 화분을 씌워놓는 이웃도 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낙엽을 긁어와서 오이 모종에 멀칭을 해줬다. 수분 증발도 막고 추위도 어느 정도 가려줄 수 있겠다 싶어서였는데 며칠 동안 시골집에 있으면서 지켜보니 아직까지는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이렇게 노심초사하며 애를 먹이던 오이에 비해 물불림을 너무 오래 해서 색이 다 빠져버린 땅콩은 싹이 모조리 났다. 반신반의하며 토마토 밑에 대충 심었는데 이건 모종으로 심은 백 개의 땅콩 중에서 냉해를 입어 누렇게 된 모종을 보충하는 용도로 옮겨 심었다. 용문산 자락이 추워서 5월 초순까지 기다렸다가 모종을 심어야 했는데 4월 하순에 심었더니 늦서리에 냉해를 입었다. 일찍 심으면 오뉴월 하루 볕이 다르다고 성장이 빠르기에 심는 시기를 잘 조절하는 것도 해마다 어렵다.


재미로 조금씩 하는 텃밭일 뿐인데도 요즘 나는 자나 깨나 모종 걱정, 누우나 앉으나 날씨 걱정에 시름이 크다. 비 소식이 없으니 마른하늘만 봐도 걱정이고 시골집을 떠나오면 저것들 물은 누가 주나 싶어서 애가 마른다. 건강을 잃고는 모든 것에 집착을 버렸는데 모종이 뭐라고 이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지만 모종들이 흙냄새를 맡기까지가 고비이고 이 시기를 잘 견디고 활착을 하고 나면 한결 여유가 생긴다. 작물의 뿌리가 길어져서 물을 잘 흡수하게 되고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가끔 돌봐줘도 알아서 잘 자란다.


이런 이유로 요즘은 시골집에서 주로 머물면서 텃밭과 꽃밭을 돌보고 선선한 시간에는 데크 위에 등산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책을 읽는다. 바깥의 그늘에서 읽으면 부쩍 침침해진 눈으로도 책의 활자가 또렷하게 잘 보여서 독서가 즐겁다. 봄 농사를 좀 확장해서 무리를 했더니 감기몸살이 찾아와 몸이 괴로운데 이웃 언니가 준 목련꽃차에 귤껍질을 말린 진피차를 오래 우렸더니 기침도 가라앉고 입이 마르는 증세도 많이 좋아졌다.


진피차는 오래 우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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