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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May 27. 2019

모종의 스캔들

넓은 밭이 생기면 새로운 힘이 어디선가 솟아나 그동안 쌓은 경험도 있겠다 올해부터는 부지런한 농사꾼이 될 줄 알았다.  결론은 골골대는 환자가 되었을 뿐이다. 봄에는 어찌 그리 날씨가 변덕스러운지 추웠다가 더웠다가 바람까지  불었대니 밭에 나가 땅을 파고 거름을 붓고 모종을 심는 노동을 했을 뿐인데도 남편과 나는 심한 몸살감기로 긴 시간 앓아야 했다. 이제야 겨우 병색을 벗어나 원래의 몸상태로 돌아왔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져서 '앞으로 나는 어찌 살아야 하는가?' 따위의 질문을 하며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어두운 채로 지내야 했다.


꽃이 피고 나무에 싹이 트는 5월이 좋고 갓 심어놓은 모종을 보살피느라 시골집에서 한동안 지냈더니 잘 참던 남편이 불만을 드러낸다. 퇴근해서 집에 와도 먹을 것이 없고 야근이 잦은 둘째 없이 혼자 밥 차려 먹고 치우면 저녁 시간이 다 지나가버려 쉴 시간이 없다는 게 남편의 하소연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다들 남편이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데 남편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게 우리 집의 고민이다. 딸들은 엄마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 지내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데 남편은 갈수록 젖은 낙엽처럼 내게 달라붙어 밥 타령을 구성지게 하고 있다.


아파트에 있으면 몸은 편한 대신 재미가 없다. 시골은 아침이 오는 게 항상 즐겁고 신난다. 눈만 뜨면 장화를 신고 밖에 나가 풀을 뽑고 마당 여기저기 물을 줘야 해서 힘은 드는데 신선한 아침 공기 속에서 내 손길을 기다리는 초록이들을 보면 힘든 줄 잊는다. 아파트에서는 아쉬운 대로 화분에 담긴 화초를 기르며 커가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한다. 시골에 있으면 이웃들이 연락을 하지 않고 불쑥 나타나서 심심하던 터에 무척 반갑긴 하지만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다. 아파트는 현관문만 닫으면 하루 종일 잠옷 차림으로 지내도 아무렇지 않다. 사실 시골을 떠나와서 아파트에 있어야 몸을 온전히 쉴 수 있다. 시골의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을 아파트에서 지내며 회복을 하고 나야 다시 일할 기운을 얻어 시골로 간다. 남편 말처럼 쉬고 즐기러 시골에 오는 건데 체력에 넘치는 밭일과 마당일은 골병을 들게 하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게 맞다.


사과나무만 심어져 있는 넓은 옆 밭을 보면 아까운 생각이 들고 뭐라도 일궈서 땅을 놀리지 않고 싶지만 어디까지나 마음뿐이고 한바탕 앓고 나니 칡넝쿨처럼 뻗어오르던 농사에 대한 집착이 수그러들었다. 시골 생활에 대한 자잘한 정보를 얻고 싶어 가입한 귀촌 카페에는 (나의 닉네임은 오월사랑이다.) 온갖 정성을 들여 훌륭한 정원을 가꾸는 고수들이 즐비하다. 삶의 목적이 오직 그것 인양 꽃 한 송이에 자지러지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글을 읽으면 사람은 이토록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만든 것들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얼마 전에 읽은 브런치 댓글 중 마음에 남는 문장을 옮겨본다. 내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나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재미로 시작한 주말 농사가 하다 보니 점점 욕심이 생겨서 삭신이 쑤시도록 몰두하게 되는 것이 이 바닥 사람들의 공통점인 것 같다. 귀촌 카페의 어느 회원이 농사에 재미를 들이면 골프채를 놓고 호미를 손에 쥐게 된다고 하셨는데 삶의 집착을 다 놓은 줄 알았던 나도 텃밭 농사는 나날이 정성을 들이게 되었다.


모종이 얼마나 자랐나 궁금하고 어서 보고 싶다는 나의 성화에 남편은 자신이 모종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다며 "이건 모종의 스캔들이야."라고 말했다. 일주일 만에 와서 본 모종은 주인의 정성에 보답하듯 냉해와 가뭄의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쑥쑥 자라 생존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얼마나 대견하고 믿음직한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짐이고 뭐고 다 내버려두고 텃밭부터 살펴보았다. 일주일 만에 만난 작물들이 이토록 반갑고 어여쁠 줄이야! 이젠 토마토의 곁순을 따주고 고추의 방아다리 아래 잎을 모조리 솎아주는 일이 남았다. 그리고 끈으로 8자 모양을 만들어 지지대와 작물을 연결하여 묶어주었다. 남편에게 여러 번 부탁해서 위로 높이 자라는 오이에게 사다리 모양으로 오이망을 만들어 주었다. 땅콩밭의 무성한 잡초를 뽑고 고랑에 검정 부직포를 덮어 앞으로 더욱 성할 잡초를 방지하였다. 나머지 고랑에도 신문지를 세 겹으로 덮어두었다. 남편이 고구마 심을 두둑을 새로 만들어줘서 끝물의 고구마순을 한 단 사서 우리 밭에도 꿀고구마를 많이 심어놨다. 이렇게 주말 동안 일을 했지만 힘들긴커녕 시간만 더 있다면 액비도 마저 뿌려주고 호박 구덩이에 거름도 더 얹어줘야 해서 지는 해가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요일 저녁이 되자 선선한 바람이 불고 개구리 소리가 들리는 시골을 떠나야 하는 게 너무나 아쉽고 월요일엔 비가 온다는데 비 오는 걸 못 봐서 남편에게 혼자 가라는 소리까지 했다. 그렇게 떠나기가 아쉽더니 오늘 아침에 우리 집으로 밥을 먹으러 온 남동생이 주말에 일을 너무 많이 했더니 쉬고 싶다며 시골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시골집에 와서 평상에 앉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며 달콤한 커피 한 잔을 마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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