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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Jun 10. 2019

앵두나무에는 벌레가 있다.

시골에 집을 짓고 삼 년은 지나야 자리 잡는다고 한다. 과연 세 번째 봄이 되자 막대기 같던 대추나무에서 반들반들한 새순이 돋아나는가 하면 작년엔 달랑 세 알이 렸던 앵두나무에는 제법 셀 수 있을 만큼 앵두가 달렸다. 봄이 되어도 마른 채 있어서 죽은 줄 알았던 병꽃나무 뒤늦게 빨간 꽃이 피어 불두화가 지고 난 마당에 산뜻한 빛깔을 더해준다.


 살구나무는 벌써 높이 자라 살구를 여러 개 매달았다. 그런데 체리, 블루베리, 사과, 매실 등의 과일나무에 열매가 달리자 뜻밖에 벌레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냥 벌레가 아니라 송충이처럼 꿈틀거리는 흉측한 벌레들이 나가지 붙어 있어서 장갑 낀 손으로 집어내는데도 볼 때마다 한 나무에 두세 마리씩 꼭 있다. 강렬한 색깔과 수많은 털로 뒤덮여 끔찍하게 생긴 놈이다. 나뭇가지의 아래쪽에도 숨어 있기 때문에 나무 밑에서 올려봐야 잘 보인다. 검색해서 알아본 결과, 모두 나방의 유충들이다.


수없이 잡아 발로 으깨어 초록뿐인 내장을 하도 봤더니 밥을 먹을 때도 생각나고 온통 벌레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괴롭기까지 하다. 이런 이유로 마당에 유실수를 심지 않는다는 이웃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나무가 아직 어려서 열매가 없을 때라 그깟 벌레가 무서워 못 심나 생각했는데 생긴 걸 보니 이제야 납득이 간다. 살구꽃은 연분홍으로 어여쁘고 일찍 피기 때문에 꽃을 보기 위해서라도 산 둘레에 살구나무만 가득 심는 사람도 있으니 벌레만 아니라면 나도 살구보다 살구꽃이 더 좋다.

  

옆 농장의 탐스런 앵두 때문에 밤잠을 설치다가 몰래 새벽 서리를 했던 게 작년 이맘때이다. 올해는 지하수를 빌려드리고 대신 앵두를 따기로 해서 큼직한 스텐 양푼을 들고 신이 나서 옆 농장에 갔다. 어르신이 그릇을 받치고 앵두가 달린 가지를 훑으면 된다고 요령을 가르쳐주셔서 그대로 했다.


그런데 커다란 벌레가 앵두와 함께 그릇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예쁜 앵두와 꿈틀거리는 흉측한 벌레라니!

아무리 벌레 한 알, 새 한 알, 사람 한 알 나눠 먹는다지만 벌레는 도무지 징그럽기만 하다. 앵두를 무척 좋아하고 해마다 앵두가 익기만을 기다리던 나는 이제 앵두와 벌레를 어쩔 수 없이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 앵두는 청으로 담을까 하다가 마음이 바뀌어 잼으로 만들었다. 설탕 섭취를 줄여보려고 청이나 잼을 안 만들려고 해도 철 따라 넘쳐나는 열매를 저장하려니 냉장고에 늘어가는 건 그런 것들 뿐이다.


그래도 물에 씻긴 듯 앵두가 어여쁘다.

 

갈래 머리 소녀가 조르륵 매달린 듯한 분홍색 금낭화를 처음 봤을 때는 감탄해마지 않았고 노란 낮달맞이꽃이 화사해서 좋아했으며 메리골드의 색감과 향에 반해 많이 심었다가 그 꽃들이 애써 가꾸지 않아도 잘 번지고 잡초처럼 화단을 차지한다는 걸 알고는 올봄에 가차 없이 뽑아버렸다. 뒷마당의 돌담 앞에 심어서 줄기가 나무처럼 굵어진 금낭화를 전지가위로 싹둑 잘라버렸을 때는 '아, 이젠 내가 시골 사람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원래 내가 좀 호들갑스러운 면이 있어서 뭐든 처음 보면 감탄을 잘하다가 금방 싫증을 내기도 하지만 시골 살이가 거듭될수록 무덤덤해져서 이웃 언니처럼 맨손으로도 꿈틀거리는 털북숭이 벌레를 태연하게 잡고 귀엽다고 할 수 있게 될 날도 곧 올 것이다.


시골 생활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공존한다. 풍성하게 얻는 수확물과 맑은 공기와 자연이 좋은 점이라면 비 오는 날 안방에서 기어 다니는 커다란 지네를 보고 펄쩍 뛰는 순간도 맞닥뜨린다. 번개 같은 속도로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집게를 가져와 얼른 지네를 집어 들어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린다. 맨눈으로 보기엔 지네가 너무 징그럽기에 선글라스부터 끼고 처리를 해야 한다. 돈벌레라고 하는 그리마 정도는 애교로 봐줘서 내버려둔다. 그래도 우리 집은 산속이 아니라서 뱀까지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 뱀은 독사일까요?'하고 사진부터 떡하니 올리고 질문을 하는 귀촌 카페의 글을 읽으면 뱀은 좀 힘들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인생에는 좋은 것만 있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굳이 벌레를 보면서 깨닫고 싶지는 않건만 요즘 내게 나방의 유충은 자꾸만 꿈틀대며 '이래도 인생이 재밌기만 하냐?'라고 기어오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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