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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Jan 07. 2016

암이 하는 역할

암에 걸리고 나서 내게 생긴 변화 중의 하나는 주변 지인들에 대한 태도이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약해졌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 쉽게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 쇠약해진 몸은 냄새에 예민해져 마스크를 껴야 했던 것처럼, 허약해진 마음에는 저 사람이 지금 내게 진심인지 아닌지 훤히 보인다.  


그 전에는 싫어도 좋아도 그냥 끌려다니며 쓸데 없는 인맥 속에 나를 방치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최근에 고향 친구와 여고 단짝을 정리했다.


삼사십 년이라는 믿을 수 없는 세월에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두껍게 덧칠되어 잘 몰랐지만 실상은 유리처럼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들을 나는 내치고 말았다.


오랫동안 연락 없이 지내던 여고 단짝과는 모처럼 만나 그 친구의 일방적인 수다를 실컷 듣고 헤어지면서 전철역에서 우리는 서로 껴안고 자주 만나자고 다짐했지만 이상하게 그 순간, 친구와 다시는 안 만나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절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을까?


다시 한번 만나긴 했지만 여전히 세 시간 동안 저 혼자 떠들던 친구에게 드디어 나는 이별을 통보했다.


고향 친구라는 이유로 고비가 있을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넘어가곤 했던 친구와도 마침내 결별을 했다.


연락이 와도 반갑지 않고, 만나자 해도 내키지 않던 친구들을 과감하게 끊고 나니 마음속은 한결 산뜻해졌다.    


요즘은 진실하고 따뜻한 사람만 골라서 만난다.


지인들과의 모임이 여럿 있어도 입만 열면 잘난 척하는 사람이 있는 모임에는 이유를 대면서 나가지 않았다.


나의 귀중한 시간과 힘을 낭비하거나 내 속에 있는 좋은 에너지를 흐트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암이란 녀석이 하는 역할은 상당하다.


욕심을 내려놓게 하니 자식 걱정이나 돈 걱정 따위를 안 하게 되고 (에잇! 될 대로 되겠지.) 사람의 진심을 바로 보게 해주니 만날 사람과 거절할 사람을 저절로 골라 준다.


무슨 일을 결정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내 마음이 정녕 원하는지 아닌지' 그것만 고려하면 되니까 판단하기도 무척 쉽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아니라, 하고 싶나 하기 싫나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면 되니 암환자가 되면 그점 한 가지는 정말 편리하고 좋다.  


이것은 가족이나 친지들이 내게 아무 기대를 안 하게 되니까 가능하기는 하다.


그저 스트레스 받지 말고 밥 잘 먹고 잘 쉬고 건강하기만을 바라니 다른 어떤 이의 팔자도 부럽지 않은 게 요즘 내 팔자다.


진작 이렇게 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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