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시골 교회에 멋진 부부가 나타났다. 요즘 유행하는 리넨 원피스를 길게 입고 쇼트커트의 머리를 한 여자분과 마 바지를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남편분은 동갑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대부분인 시골 교회에 내 또래의 새로운 신자가 나타난 것은 무척 기쁜 일이었다. 서울에서도 여간해선 보기 힘든 세련된 외모의 부부에게 선뜻 말을 걸기가 어려워 몇 달이 지난 뒤에야 말을 섞게 되었다.
주일이면 여자분이 입고 오는 리넨 원피스가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보니 혜화역 근처의 샾에서 살 수 있다면서 언제 같이 가자고 하셨다. 몇 년 동안 옷을 사지 않고 있던 터라 필요하기도 했고 리넨 원피스를 간절히 찾고 있었는데 한눈에도 값이 꽤 나가보였다. 백화점 옷값에 비하면 그리 비싸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드디어 어제 약속이 잡혀서 예전 직장 다닐 때 백화점에서 산, 천연 염색 옷인 이새 원피스와 어울리는 캠퍼 단화를 맞춰 신고 화장까지 약간 하고는 집을 나섰다.
사실 며칠 전 추석에 여동생이 전혀 꾸미지 않은 나를 보고 한 마디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시골살이한다고 옷을 사지 않고 몇 년을 보냈더니 명절이라도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추석 아침에 큰집에서 음식을 하느라 바빠서 머리도 대충 말리고 입던 옷 그대로 친정에 갔던 내 모습이 누가 봐도 초라했다. 드디어 옷을 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기왕이면 천연섬유로 된 옷이 사고 싶었고 리넨 원피스는 마른(!) 내 체형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느낌표를 찍은 이유는 이젠 명절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살찔 걱정이 없는 자신이 아직도 믿기 어려워서다.
주택가의 조그만 가게에는 내가 그토록 찾던 리넨 원피스가 나무 행거에 걸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뽐내고 있었다. 서너 벌을 입어보자 내게 어울리는 색과 디자인이 결정되었다. 일단 요즘 입을 수 있는 두께의 원피스와 리넨 머플러를 골랐다. 가격이 물론 싸진 않았지만 계절별로 하나씩만 장만하면 각종 모임과 결혼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겹쳐 입을수록 멋이 더해지는 리넨 특유의 느낌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실로 몇 년 만에 옷을 고르고 입어보고 결정하는 일은 즐거웠지만 이젠 체력이 부족해서 좀 힘들었다. 내친김에 더 추워지면 입을 수 있는 짙은 색의 도톰한 원피스와 모헤어 롱 카디건까지 사러 내일 다시 가기로 했는데 남편에게는 첫 번째 산 원피스까지만 알리는 걸로 했다. 남편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그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오늘 또다시 가게를 찾아갔다. 이틀 전 찜해두었던 먹색 원피스와 모헤어 롱 카디건을 사고 프랑스 자수가 놓인 목걸이를 걸어주니 산뜻하게 어울린다. 세 벌을 모두 합치면 백만 원이 넘는 가격이지만 그동안 절약하며 알뜰하게 산 나에게 주는 선물로 이만한 게 없었다. 시원한 바람에 기분 좋게 감기는 리넨 원피스를 입고 외출을 하니 날개를 단 듯 진짜 날아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발걸음이 가볍고 상쾌했다. 나의 보잘것없는 몸매를 가려줄 뿐 아니라 자연스럽고 편안한 촉감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돌아와 머플러와 레깅스까지 모두 겹쳐 입으니 얼마나 멋스럽던지 날씨가 빨리 추워지기를 바라게 되었다. 밑창이 떨어져서 버리려고 내놓았던 캠퍼 앵클부츠가 리넨 원피스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제는 남들이 나에게 예쁘다고 하지 않는다. 나이가 많은 여자에게 쓰는 표현인 '곱다'라는 말을 식당 주인에게 처음 들었을 땐 큰 충격을 받았다. 나에게 물병을 건네주며 "얼굴이 참 고우십니다."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예쁘지 않고 고운 여자가 되었다. 내가 몸매는 비루할망정 얼굴은 친정 엄마를 닮아 예쁘다는 말을 듣고 살았는데 야속한 세월은 어느덧 고운 할머니 대열에 서게 만들었다. 비싼 돈 백만 원은 여자로서 마지막 매력을 발산하고 장렬히 스러질 '고운' 나에 대한 보상이자 무심한 남편에 대한 복수인 셈이다.
남편은 언제든 옷을 사 줄 테니 말만 하라고 한다. 하지만 중년 여자가 입을만한 옷값이 얼마 하는지 안다면 아마 속으로 기함을 할 것이다. 좋은 원단에 튼튼한 바느질로 만든 리넨 원피스를 오래 두고 입으며 멋까지 낼 수 있다면 그 값은 톡톡히 할 것 같다. 입어보기만 한 빨간색 원피스도 하객 패션으로 그만이었으나 리넨의 입문 단계라 무난한 색부터 천천히 적응해나가기로 했다. 암에 걸린 뒤부터 사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어서 남편이 생일 선물을 물을 때마다 대답을 못 했는데 이젠 다 사고 싶어 졌으니 남편은 아내에게 천금을 아끼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