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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과 예술 그리고 돈

우리 집의 주목 나무가 갤러리에 서다.

by 화이트

시골에 살면 예술과 멀어질 듯싶지만 그렇지 않다. 자연과 예술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걸 이번에 알았다. 양평의 자랑스러운 예술가인 손영희 캘리그래피 작가가 카페 겸 갤러리에서 글씨전을 열고 있는데 우리 집의 주목나무가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위치해 있다.


말라죽은 주목나무를 손 선생님이 달라고 하실 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예술가는 생활의 모든 사물을 예술로 연관 지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 나무가 죽어서 저런 호사를 누리다니 할 수만 있다면 나무 아래에 조그맣게 우리 집에서 나온 나무라고 써붙이고 싶은 심정이다.


김 훈 작가가 온 동네 새들이 자기 집에서 키우는 진돗개 털로 새집을 만드는데 내장재로 쓴다며 동네 반상회에서 자랑하려는 걸 아들이 말려서 겨우 참았다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무 모양이 유난히 예뻐서 애석했는데 저렇게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으니 이젠 여한이 없다.


죽은 나무라도 뿌리째 뽑는 건 쉽지 않다. 힘쓰는 일은 용케 피해 가는 남편을 대신하여 특전사 출신인 이웃 남자가 임꺽정 같은 기운으로 혼자서 뽑았는데 자신이 뽑은 나무를 보러 그 이웃도 전시회에 왔다. 글씨 카드를 잔뜩 매달고 서 있는 주목 나무를 보더니 자신이 가져갔으면 장작으로 쓰고 마는 건데 라며 어쩐지 입맛을 다시는 표정이라 큰일 날 소리를 들었다.



도시에 살 때는 일자리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체력도 안되고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해서 우두커니 시간을 보냈지만 시골에 와서 마침내 나에게 딱 맞는 일을 구했다. 예술가가 많은 양평이다 보니 그런 이웃을 만나 한동안 동영상에 출연했는데 이젠 돈을 받게 되었다.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새 옷을 입고 꽃이 핀 마당에서 수다 몇 마디와 포즈를 취하면 된다. 한 시간도 안 되는 데다 좋아하는 리넨 원피스를 입고 마음껏 예쁜 척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계절에 따라 새로운 원단과 옷은 자꾸 나오고 한 달에 두세 번은 촬영을 하니 처음엔 뭘 돈을 받고 하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역시 돈의 힘은 대단했다. 어제 서울의 단골 미용실에 커트를 하러 갔는데 입고 간 리넨 옷을 칭찬하는 미용사에게 나도 모르게 "저 모델이에요!" 라며 보여달란다고 동영상을 켜서 마구 자랑을 했다.


머리 모양이 평범하다는 말을 들었다니까 더 신경 써서 잘라주며 다음엔 좀 더 짧게 다듬어 주겠다고 했다. 하여간 모델은 참 좋은 것이다. 아무 곳에도 오라는 데가 없고 갈 데가 없는 처지의 나를 꽃무늬 원단이 잘 어울린다고 자신의 시그니처 원피스를 입어 달라니 이태리 수입 원단의 귀티 잘잘 나는 옷을 입는 내 기분은 선녀 옷을 입고 저 산 너머쯤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친정 엄마가 시골에 집을 지은 건 내 평생에 제일 잘한 일이라고 자주 말씀하시더니 시골 생활을 시작하고는 예술이 뭔지 통 모르는 나 같은 무지렁이가 전시회에 우리 집 나무가 서있지를 않나, 동화작가가 만든 천상의 옷을 입고 선녀 놀음을 하고 있으니 양평의 시골 생활은 나에게 예술과 돈을 양손에 쥐어 주었다.


지난 주말에는 먼저 심은 땅콩을 캐서 먹으며 남편과 "가을이 되어 땅콩을 먹으니 또 한 해가 가네."라고 씁쓸 고소한 대화를 나눴다. 남편은 땅콩을 처음 캔 줄 알지만 이미 두 예술가에게 땅콩을 잔뜩 캐어 삶아도 주고 씻어도 드렸다.


예술을 모르는 나는 땅콩 키우는 재주 밖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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