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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거지

거지인데 별장이 있다.

by 화이트

대지 150평에 20평 단층집을 별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양평에 전원주택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내가 부자인 줄 알까 봐 굳이 별장거지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나면 내 마음이 좀 편해지고 실제로 가진 게 별로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솔직한 것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안 해도 될 얘기까지 덧붙여하는 버릇이 내겐 있다. 배냇병이라 못 고친다.


직접 키운 채소를 수확해서 먹는 즐거움과 바람이 솔솔 부는 아침저녁에 시원한 공기를 쐬면서 농사를 하는 기쁨은 세상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다. 특히 평상에서 비가 오는 마당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힘들었나 내 인생' 이래 가면서 지나온 세월을 곱씹으면 지금의 기쁨이 새록새록 커지기에 상처의 딱지를 살살 뜯는 기분으로 직장 생활하면서 힘들었던 순간을 되짚곤 한다.


내 집을 짓고 5년이 지나고 나니 시골에 대한 로망이 어느 정도 채워진 기분이 든다. 지팡이 같던 나무들이 튼실하게 자리를 잡았고 야생화부터 장미까지 꽃도 골고루 키워봤다. 이젠 벌레나 잡초를 보고도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내공도 갖췄다. 낙엽이 떨어지면 시골집의 운치로 생각하고 쓸지 않게 된 건 물론이다.


딸들이 학교 친구들을 시골집으로 가끔 데리고 오더니 이젠 사회생활이 넓어져서 지인들을 '별장'으로 불러 하루 이틀 자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신세 진 사람들에게 시골집에서 같이 하룻밤 자는 걸로 보답을 하면 최고라면서 시골집이 있어서 참 좋다고 말한다.


주말에만 가는 남편은 그럴 때마다 시골집을 딸에게 양보해야 하는 불편이 있지만 나는 평일에라도 가면 되니까 크게 상관이 없다. 손님들이 묵고 간 다음날 바로 가서 쓰레기를 정리하고 청소나 집 상태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내 집이니 그만큼 소중하기에 살뜰하게 보살피는 건 당연하다. 전철과 마을버스를 타고 가면 세 시간이 걸리지만 나들이 삼아 가는 거라 힘들지 않다.


차가 없어도 전철역 근처에 여섯 번의 마을버스가 있어서 시간만 맞추면 되고 그것도 안 맞을 땐 하나로 마트의 배송 차량에 오만 원 이상만 사면 사람까지 실어다 주는 서비스를 이용하면 된다. 시골 할머니와 농사 얘기를 하면서 가는 재미도 나쁘지 않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 모르게 지나간다. 일주일을 나눠서 도시와 시골 생활을 하는 3도 4촌 생활을 하다 보니 안 그래도 쏜살같은 시간이 총알처럼 지나가버린다. 농작물의 결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데 올해 무 농사는 알타리 수준에서 그쳤다. 종아리만 한 무는 첫 해만 성공해보고 늘 자잘한 무로 끝나고 만다. 늦게 심은 탓도 있고 잘 보살피지 못한 게으름의 결과이다.


예년보다 서리가 일찍 내려 무밭에 비닐이라도 덮어 놓지 못한 마음이 초조한데 딸이 전신 거울을 택배로 주문하니 포장재로 엄청나게 긴 뽁뽁이 비닐이 딸려와서 그걸 창고에 챙겨뒀다가 밭에 오자마자 덮었다. 옷을 갈아입을 여유 따윈 없어서 무릎까지 오는 모헤어 카디건을 입은 채 일을 하고 났더니 도깨비 가시가 잔뜩 붙어 한참을 떼야했다.


씨만 뿌려놓고 한번 솎은 게 전부인데 이만큼이라도 커준 게 어딘지 무를 뽑을 땐 미안하면서 고마웠다. 내년엔 틀림없이 더 잘 키우려고 다짐만 몇 해인지 모른다. 친정 엄마에게 시골집에 도착하자마자 무에 비닐을 씌웠다니까 이젠 농사꾼이 다 되었다고 하셨다. 엄마가 처음 농사짓던 밭에 와서 이것도 농사냐고 비웃은 지 거의 십 년만이다. 나처럼 뭐든 하면 늘게 되어 있다.


이젠 거지 타령을 할 순서이다. 석 장 들여 시골집을 장만하고 나니 남은 돈이 바닥나서 뭐든 고치고 꿰매고 없이 살고 있다. 마침 미니멀 라이프가 대세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 집엔 고장 나고 낡아서 자꾸 갖다 버릴 것만 생기고 새로 들어온 것은 없어서 저절로 집이 넓어지고 훤하게 변했다.


지금 입고 있는 파자마부터 신고 있는 버선까지 천을 덧대어 누덕누덕 기운 것뿐이다. 낡은 것은 그대로 편한 게 좋아서 버릴 수가 없다. 그러니 자꾸 꿰매게 된다. 요즘은 손님이 집에 오는 일이 없으니 식구들만 뭐라 그러지 않으면 얼마든지 덧댈 수 있다. 흥부가 울고 갈 정도로 여기저기 기운 옷은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아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남편은 내년이 환갑인데 자동차를 바꾸고 싶어 한다. 새로 사려는 차는 지금 타는 차보다 두 배쯤 비싸니 아무리 돈을 모아도 턱없이 모자란다. 내게는 마지막 비자금이 얼마쯤 있는데 이걸 털어서 남편의 환갑 선물로 차를 보태 사라고 해얄지 참아야 할지 누더기 옷을 입은 거지의 고민은 자꾸만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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