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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전문 작가

by 화이트

브런치에서 작가 카드를 준다고 한다. 브런치가 보내준 나의 작가 프로필엔 시골 전문이라고 되어 있다. 시골 전문답게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골 살이 글을 쓰고자 했으나 늘 그렇듯 시시한 신변잡기에 불과했는데 오늘은 일상 글이 아닌 '고백'의 글을 쓰고 싶다.


브런치가 드넓은 인터넷의 바다라면 암 카페는 조그만 옹달샘이라서 퐁퐁 솟아 나는 나의 사생활은 주로 암 카페에 썰을 풀곤 했다. 투병하느라 하루하루 힘든 회원들에게 잠시나마 빵 터지는 글로 아픔을 덜어준다는 쓸데없는 자부심으로 안 나오는 글을 억지로 짜내서 쓴 적도 많다. 그러다 스스로 한계가 와서 지금은 잠정적으로 글을 쉬고 있다.


브런치는 많은 사람이 읽는 대신 암 카페처럼 댓글이 많이 달리는 것도 아니고 피드백이 없다 보니 꾸준히 쓴다는 게 힘들었는데 이것도 농사처럼 꾸준히 하다 보니 작가 카드라는 뚜렷한 결과물이 있다는 게 나 같은 백수에겐 중요하다. 인정과 격려가 꼭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니까


가족들이 힘껏 바깥에서 능력을 다하도록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의미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 봐야 집안일이니 성취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오늘 아침엔 김밥을 말아 딸에게 도시락을 싸줬으나 아침엔 통화를 자제해달라는 핀잔만 들었을 뿐이다. 시누이의 생일이라 아침부터 축하송을 불러재낀 내 잘못이다. 어깨춤까지 춘 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관심은 더 필요한 법이니


김장을 망쳤다. 암 카페에 불이 나도록 자랑했던 김장 김치가 배추가 무르는 사태가 발생했다. 고랭지 배추의 생육 기간이 90일을 못 채우면 그런 현상이 생긴다고 추측만 할 뿐 정확한 원인은 나도 모른다. 김치 다섯 포기가 들어가는 커다란 김치통 세 개를 시누이와 조카 그리고 이웃에게 드리며 사정을 설명하곤 미안한 마음에 대봉 다섯 개와 보리쌀까지 얹어 드렸다.


무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먹어야 하는 탓에 김장을 하기 어려운 주변 분들에게 나누어 드렸으니 잘된 일이기도 하다. 기대를 많이 했던 내 탓인가? 이렇게 또 인생의 교훈을 호된 값을 치르고 배우게 되었다. 세상엔 공짜가 없고 허황된 기대는 커다란 실망으로 뒤로 나자빠지게 된다는 걸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건 나이가 이만큼이나 들어서도 똑같다.


살다 보면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그럴 땐 깊이 생각해보고 내 마음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굳히면 된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더라도 내가 결정한 일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다. 암을 경험하면 이런 선택이 쉬워진다. 아주 쉽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가? 예스! 내가 원치 않는가? 그렇다면 노!


무척 간단해 보이는 이 일이 복잡한 인간관계에 얽히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건 누구나 겪어봐서 아는 일이다. 내가 원하기보다 상대방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건 내가 요령이 없어서인지, 우유부단해서인지, 분명한 결단력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결과이겠지.


하지만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힘들다고 신호를 보내오면 참지 말고 결정해야 한다. 설령 나중에 후회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지금 내가 생각하는 일이 간절하다면 결단하고 실행할 일이다. 쓸쓸하고 외롭다고 곁에 있을 사람이 없다고 아닌 줄 알면서도 관계를 끊지 못하는 건 이십 대의 청춘일 때나 가능하던 짓이다.


시골에서 사귄 빨간 머리 앤과 작별했다. 재능이 넘치고 생기발랄한 앤을 친구로 두기엔 다이애나가 너무 모자라고 초라하기 때문이다. 이젠 다이애나도 늙어서 뽀얀 뺨이 처지고 주름져서 더 볼 수 없기에 앤의 친구로 남아 있을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앤과 아름답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재미없고 쓸쓸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이별은 했지만 아직 앤을 놓아주지 못한 것 같다.


공무원이라는 삭막한 세상에서 살아온 나에게 예술이라는 신세계를 보여준 앤이 나는 참 신기하고 새롭기만 했다. 앤이 날마다 놀라운 일을 벌이고 펼쳐나가는 일상을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기에 같이 덩달아 신명 나는 몇 년을 보냈다. 하지만 눈부시게 독보적인 앤에 비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다이애나는 그저 무난한 존재일 뿐, 앤을 끝없이 찬미하고 흠모하는 일에 지쳐버렸다.


평범할 뿐만 아니라 지 주제를 잊은 한심한 다이애나는 시골 전문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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