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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 이래서 무섭습니다.

암으로 맺은 인연

by 화이트

친정 엄마의 3차 접종으로 서울에서 부산에 다시 내려갔다. 엄마가 부작용이 없으면 다음날 포항에 있는 횟집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그곳은 내가 가입해 있는 네이버 암 카페 <아름다운 동행>의 회원이 운영하는 곳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전화로 들리는 목소리는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친밀함이 느껴졌다. 횟집의 방에서 하룻밤 묵기로 하고 울산에 사는 여동생이 운전하는 차로 세 모녀는 따스한 늦가을의 바람을 가르며 포항의 한적한 어느 바닷가 마을을 찾아갔다.


새로 지은 이층 건물의 횟집으로 들어가니 회원은 볼 일이 있어 외출 중이었고 주방에서 일하는 분이 맞아주셨다. 엄마는 약간 피곤하셔서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들어가 먼저 쉬고 있으려니 마침내 그분이 들어오셨다. 경북 지방의 사투리가 경남과는 조금 다르긴 해도 수다스러운 가운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엄마를 포함해서 여동생과 나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을 접했다. 투명하고 찬란한 무늬오징어 회를 먹고 있으려니 뜨끈한 아귀 간을 오이와 양파 위에 얹어 주시는데 식감이 극히 부드럽고 맛은 언젠가 먹어본 푸아그라보다 고소했다. 단골에게만 제공되는 아귀애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자고 나니 아침에는 국물이 속까지 시원한 복국과 싱싱한 대삼치를 구워 주셨는데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그 맛은 내가 알던 삼치가 아니었다.


어장을 운영하는 횟집이어서 새벽에 경매 시장에도 함께 가보았다. 티브이에서나 보던 경매 현장을 보니 아귀가 여기저기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고 자잘한 전갱이며 삼치와 커다란 대방어가 배에서 내려지고 있는 구경은 펄떡이는 삶의 현장을 그대로 보는 기분이었다.


감동의 대미는 우리에게 싸준 엄청난 양의 생선이었다. 동행 카페에도 자주 생선 나눔을 해오셨던 분으로 횟집의 수요량을 채우고 나면 어차피 남는 거라며 아구와 삼치와 도미 그리고 작은 갈치를 손질하여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잔뜩 담아주셨다. 태어나 이렇게 많은 생선을 처음 다루게 되어 세 모녀는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에 세수도 안 한 얼굴로 얼른 친정으로 돌아가서 각자 생선을 나누기 시작했다.


욕심이 없는 편인 여동생이 친한 이웃들에게 주고 싶다면서 어쩐 일로 삼치를 챙기는 걸 보니 물 좋은 생선이 좋긴 한 모양이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오늘 새벽에 잡은 많은 아구를 보니 좋으신지 정신이 없어 보이셨다. 나는 입이 짧은 남편을 위해 아구 한 마리와 삼치 두 마리를 챙기고 도미를 따로 가져왔다. 아귀탕을 끓여 삼치를 구워주니 남편은 동해에서 건진 신선한 바다 맛에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친정 엄마는 항상 내가 동행 회원들을 시골집으로 불러서 밥을 해먹이고 잠을 재우며 실속 없이 퍼준다고 마땅찮아하셨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더한 사람을 보게 되어 나는 그동안 잔뜩 수그러진 어깨가 펴지는 기분이었다. 그 회원 분도 뭐든지 "재밌잖아요."라고 하면서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이런 일을 한다고 했다.


암에 걸리면 사람이 이렇게 변하게 된다. 건강을 잃게 되면 가장 부질없는 것이 재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 뒤돌아 봐 진다. 돈보다는 사람이 좋고 따뜻한 정이 소중한 걸 깨닫게 되며 남은 인생을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살고 싶어 진다. '암'이라는 한 마디에 처음 만난 사이라도 같이 눈물이 글썽해지고 서러운 동병상련으로 보듬게 되니 이렇게나 퍼주고 반겨주는 암이 신기할 지경이다.


이 분은 투병하느라 결혼이 늦고 아이도 늦게 낳아서 소중한 아들이 아직 일곱 살 인 걸 알고는 여동생에게 어린이용 영양제를 챙겨 오라고 했다. 고작 작은 약통 하나 드리고는 온갖 호강을 있는 대로 누리고 와서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엄마는 이모들에게 자랑하느라 전화기에 불이 났다. 내가 오지랖도 넓지, 씀씀이가 헤프지, 사람 좋아한다고 엄마는 구박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점수를 땄다.


완치되고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암 카페를 떠나지 못하고 머무는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 꽤 많다. 환자였던 경우도 그렇지만 가족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도 카페에서 계속 활동하시는 분도 있다. 떠난 가족이 생각날 때면 동행에 들어와서 글을 읽으며 공감과 위안을 얻는다고 한다. 암에 안 걸려본 사람들은 뭐하러 아픈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울한 얘기를 하냐고 속 모르는 말을 하지만 암에 걸려보면 같은 암환자만이 공유하는 감정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끈끈하고 애절한지는 암에 걸려봐야 알 수 있으니 암은 이래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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