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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 남편과 과식하는 아내가 만나면

맛있는 것만 보면 엄청나게 많이 먹는 딸들이 생깁니다.

by 화이트

남편은 동네가 다 아는 미식가이다. 물론 소문의 근원지는 당연히 나지만 남편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내게 동정의 말을 건네곤 한다. 남자가 입 짧은 건 여자 평생 골병이라는..


나는 위암에 걸리기 전까지 과식하는 사람이었다. 쌓이는 서터레스를 먹는 것으로 해결하는 편이라서 자기 전까지 먹을 걸 달고 살았다. 명절 연휴가 지나면 몸무게가 2킬로씩 늘었는데 그걸 도로 빼려면 두어 달 운동을 하며 고생을 해야 했다.


남편은 타고난 입맛이 예민한 데다 부자인 형과 살림꾼인 형수 밑에서 최고의 집밥을 먹어온 사람이었다. 내가 차려준 빈약한 밥상에도 남편이 말없이 먹은 이유는 맞벌이를 했지만 살림을 좋아했기에 빠른 솜씨로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을 차려줄 수 있었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자기 전에 항상 머리 속으로 내일 아침 국과 반찬을 미리 떠올려야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전업주부가 되고 남편은 더욱 까다로운 입맛으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밥해먹는 것이 결혼 생활을 위협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나는 남편의 식성으로 랩을 할 지경이 되었다. <한번 먹은 것은 안 먹고, 냉장고 들어갔다 나온 건 안 먹고, 국 없으면 안 먹고, 맛없는 것은 안 먹고, 나물은 갓 무친 것만 먹고, 새로 한 반찬만 먹고, 맛있는 것만 먹고>


금방 한 밥만 먹는 밥투정이 없는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주변에는 그런 기함할 남편들도 가끔 있다고 하니까. 딸들은 내게 안 해주면 되지 않냐고 하면서 아빠가 밥상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도 무시하면 되는 일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다가도 이번 생은 틀렸으니 그냥 살던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도 한다.


어제는 저녁 식사로 샤부샤부를 해 먹으면서 첫째가 미식가인 아빠와 과식하는 엄마를 만나면 자기들 같은 딸들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건 자신들이 바로 '맛있는 것만 나오면 정신없이 과식을 하는' 괴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빠를 닮아 섬세한 미각을 가진 둘째는 자기 마음에 드는 반찬이 있어야 식탁에 앉고, 나를 닮았다는 첫째는 맛있는 걸 보면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


남편이 좋아하는 식사는 백반이다. 일품요리나 덮밥보다는 밥과 국이 따로 나오고 나물과 깔끔한 반찬으로 차려지는 밥상을 선호하니 늘 새로운 메뉴를 짜야하는 내 머릿속은 복잡하다. 다행스럽게도 시골 텃밭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푸성귀를 따기 시작하는 계절이 되면 이런 고민이 한결 덜어진다. 밭에서 바로 딴 가지 오이 고추 상추 부추 취나물 등으로 반찬을 하면 마트보다 훨씬 맛있는 채소여서 이것만으로도 풍성한 밥상이 된다.


남편의 혈관 건강은 말할 것도 없이 아주 좋다. 소식과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니까 검진을 하면 모든 수치가 정상의 범위에 속해있다. 그래도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서 남편은 체중이 적게 나가는 자신이 항상 불만스럽다. 더 먹으면 될 것인데 위의 탄성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닌 듯싶다. 딸들과 나는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 없어서 "아니, 계속 먹으면 될 걸, 그게 그렇게 어렵나? 젤 쉬운데?"라며 떠든다.


나는 지난달의 건강 검진에서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의 섭취를 늘이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다. 근육을 키워야 당뇨를 예방할 수 있다고 근력 운동을 하라는데 아직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위전절제라 위에서 생성되는 비타민 B12가 모두 소진되었다고 이젠 주사를 맞아야 한다. 골감소증도 생겼는데 비타민 D가 있어야 칼슘 흡수를 돕는다고 의사가 권해서 먹는 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빵떡면을 줄이라는 말에 우울했지만 지금도 이웃이 준 떡을 먹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남편은 장수의 조건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라 예상대로라면 90세 이상 무난하게 살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진지하게 실내에서 하는 정적인 취미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골프 외에는 무취미인 남편이 걱정되어 한 말에 남편은 자신은 골골하여 장수할 수 없다는 말만 했다. 남편보다 일찍 죽을 운명(?)인 나로서는 그 정도 충고를 해 준 것으로 할 일을 다 했고 그 뒤의 일은 남편이 알아서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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