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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Jun 12. 2023

열무 꽃밭

거름 없는 땅에 열무를 뿌리니 꽃대가 먼저 올라왔다.

올해 농사 실패기 2탄 되겠다. 틀밭에 잘 먹지도 않는 바질과 루꼴라를 심어 맛있는 상추가 부족했던 것이 실패의 첫걸음이라면 열무를 수확해서 물김치를 담아 먹어야 하는 지금 텃밭에는 열무꽃이 한창이다. 하얀 나비까지 폴폴 날아드는 열무 꽃밭은 앞으로 더욱 화사해질 것 같아서 꽃 볼 욕심에 열무를 지 않고 놔뒀다.


원래는 고구마를 심으려고 마련해 둔 밭이라 거름을 하지 않고 고구마 한 단을 심었는데, 심고 보니 간격이 넓어 그 틈새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열무는 초여름에 수확을 하니 고구마의 생장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열무씨 한 봉지를 사다 고구마 순 사이에 줄을 맞춰 뿌렸다. 열무는 물을 자주 주고 어느 정도 거름기가 있어야 잘 자라는데 봄가뭄이 심해 일주일에 한 번 가서 주는 물로는 부족하고 영양마저 없으니 잎이 노랗게 크지 않다가 일찌감치 꽃을 피웠다.


열무꽃은 여리여리한 보랏빛으로 무척 가련하게 예쁘다. 고구마도 가뭄을 타서 싹을 보아하니 사 먹는 게 나을 듯하다. 열무꽃이 키가 커져서 꽃밭으로 엉켜도 고구마가 잘 되거나 말거나 뽑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는 걸로 올해 열무 농사는 마무리해야겠다.  


완두콩은 재배가 쉽고 수확이 빨라 초보 농사꾼에게 알맞은 작물이다. 3월에 완두콩 씨앗을 심어서 어느 정도 자랐다 싶으면 얇은 지지대를 하나씩 꽂으면 된다. 콩 꼬투리가 차오르고 진한 초록색이 연둣빛으로 변하며 표면에 그물 무늬가 생기면 다 익은 것이다. 꼬투리채 삶아서 먹어도 맛있고 까서 밥에 넣어도 카레에 뿌려 먹어도 완두콩은 어여쁘다.


조선오이도 씨를 뿌려 여덟 포기나 옮겨 심었다. 일주일마다 가면 여기저기 달려 있는 오이는 선물하기에 좋고 여름 반찬으로 필수품이라 많이 심을수록 좋다. 가지는 아직 성장이 더디어 이제 꽃이 달렸다. 텃밭에 두더지 구멍이 많이 있어서 작년엔 가지뿌리가 들떠 거의 수확을 못 했다. 아침 산책길에 마른 밤송이를 주워다 두더지 구멍에 쑤셔 넣었으니 올해는 가지를 많이 딸 수 있을 것 같다. 아삭이 고추까지 더하면 여름 밥상은 이 세 가지만 있어도 그럭저럭 차려진다.


그 밖에 부추와 방아로 전을 부치고 감자를 수확하면 시장에 가지 않고도 주말 밥상쯤은 간단하게 준비할 수 있다. 시절 따라 앵두, 블루베리, 토마토 등으로 입가심을 할 수 있으니 남편과 나는 외식을 하지 않고 시골집에서 소박하게 밥을 먹는다.




6개월마다 하는 검사에서 당수치가 조금 올랐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느슨해져서 검사 3개월 전부터는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데 나는 반대로 했다. 첫 석 달은 식이와 운동에 열심이다가 자신이 붙어서 슬슬 탄수화물을 늘이고 있었던 것이다. 식후에 옥수수 뻥튀기를 먹고, 아침 식사에는 오트밀을 먹고도 통밀빵을 구워 한쪽 먹고 빵이 좀 작으면 조금 더 먹기도 했다. 배가 출출한 시간이면 간식으로 아몬드를 한 줌보다 더 먹고 스틱 치즈를 먹기도 하고 그래도 배가 안 차면 무가당 카페라테를 한 잔 마셨다.


간식도 안 먹는 편이 좋고 식사를 많이 하는 것도 나쁘기 때문에 부족한 듯이 먹고 배고프게 지내야 하는데 집에 있으면서 그걸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다시 수치가 오르는 결과가 나와서 한동안 기분이 울적했다. 평생 이렇게 살 자신이 없고 마음 놓고 못 먹는 신세가 처량하기만 했다. 매 끼니마다 운동하는 것도 힘들지만 먹는 걸 절제하는 게 더 힘들었다. 암이 완치되고 나서 내 멋대로 먹은 대가치고는 평생의 가혹한 벌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책장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책,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다시 읽었다. 채식만으로 완벽한 건강을 누리다가 천수를 다하고 죽은 니어링 부부의 식단과 철학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채소로 끓인 수프와 초록잎으로 만든 샐러드, 견과류, 씨앗 등으로만 유지한 식탁은 맛있고 풍족하며 소박했다. 확고한 신념이 있다면 채식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식생활을 할 수 있고 그것으로 행복을 충분하게 누린다는 걸 헬렌 니어링은 강조하고 있다. 그녀의 글은 자발적으로 식습관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새로운 영감을 내게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했다.


기왕 딸과 함께 하는 현미 채식이니 당질만 줄이면 되는데 탄수화물에 미련을 못 버리는 내게 헬렌 니어링은 우리가 평소에 당질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탄수화물을 줄여야 해서 잔뜩 풀이 죽은 내게 '너도 할 수 있어!'라는 힘찬 격려와 응원을 보내는 듯한 이 책이 내 기분을 바꾸는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하고 식습관을 바로 잡는 것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을 읽은 이후로 식사에서 탄수화물을 대폭 줄이고 간식도 거의 안 먹을 수 있었다.  



아침엔 소스 없이 샐러드를 커다란 접시에 가득 먹고 삶은 달걀 두 개를 먹은 후 배가 고프면 통밀빵 한 조각만 먹고 그다지 출출하지 않다면 빵은 생략한다. 점심과 저녁에는 현미밥을 반 공기에서 두 숟갈로 줄였다. 대신 상추나 나물, 두부 등 다른 반찬을 많이 먹으려고 노력한다. 자연식물식을 하는 딸이 없는 주말 시골집에서는 남편을 위해 닭백숙이나 보쌈으로 배를 든든히 채워오기도 한다.


이젠 나의 건강을 위해서 탄수화물을 줄이고 간식을 건너뛰며 소박하고 가난하게 먹는 것이 더 이상 억울하거나 힘들지 않다. 나는 가끔 먹는 육식조차 아예 하지 않는 완벽한 자연식물식을 하는 딸도 있는데 조금 덜 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원통할 일이 아니라는 걸 헬렌 니어링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내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혈당이 뒤에서 바짝 쫓아오지 않는다면 탄수화물 위주의 나쁜 식탐과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른 버릇을 스스로 고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열무와 고구마와 잡초가 공존하는 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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