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이트 Jun 01. 2023

루꼴라 지옥

한국인에게는 상추가 제일 맛있다.

시골집 마당 끝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텃밭이 있어서 작년에 벽돌로 틀밭을 다섯 개 만들어 쌈채소 등의 용도로 사용한다. 모둠 상추와 서양 상추인 버터헤드 그리고 얼갈이를 씨앗으로 뿌리고 틀밭의 구석 자리엔 고추 오이 파프리카 양배추 모종을 몇 개씩 심었다.


그리고 올해 농사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 루꼴라와 바질을 그것도 섞어서 틀밭 하나에 다 뿌린 것이다. 처음에 루꼴라를 먼저 뿌렸는데 발아가 덜 된 곳이 있어서 거기에 바질 씨앗을 뿌렸다. 거름을 먹고 순식간에 자란 루꼴라 그리고 곧이어 쑥쑥 자란 바질이 곡하게 틀밭에 가득 찼다.


비질 보다 조금 키가 자란 루꼴라를 먼저 솎아서 요리해 보았다. 피자에 얹어 나오는 몇 가닥 안 되는 루꼴라가 어쩐지 귀해 보여서 막연히 심었는데 맛이 쓰고 매웠다.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루꼴라와 바질을 무슨 마음으로 심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으니 나는 이렇게 맥락 없이 엉뚱한 면이 있다.


토마토 수프에도 왕창 썰어서 넣어 보고 통밀 가루에 반죽해서 루꼴라전도 만들었으나 맛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식구들이 모두 외면하는 엄청난 양의 루꼴라는 심은 사람인 내 차지가 되어 큰일인 데다 바질이 자라니까 이제 루꼴라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바질은 마트에서 파는 바질 페스토를 만들어보려고 심었는데 참고로 바질 페스토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상추보다 성장 속도가 빠른 루꼴라와 바질이라 일단 지난 주말에 모두 뽑았더니 커다란 김장 소쿠리에 가득 넘치게 찼다. 문제는 그 두 채소를 구별해서 나눠야 하는데 잎 모양이 살짝 다를 뿐 거의 비슷하게 생겨서 나는 수돗가에 앉아 오후 내내 손질하며 루꼴라와 바질의 구분 작업에 매달렸다. 후회와 자책을 거듭하며 동시에 이 엄청난 루꼴라를 어디다 줘야 하나 골머리를 앓았다.


우리 뒷집에는 남아공의 그녀가 산다. 한국말을 못 해서 루꼴라를 설명 없이 갖다 안겨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서양 요리를 주로 먹는 집이니까 좋아하지 않을까 궁리를 했다. 그런데 한 집에서 다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라 그 옆집에 새로 이사 온 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 집을 짓기 전에 내가 세 들어 살든 집인데 이번에 집을 사서 왔다고 했다.


일단 한국말이 통하는 예전 셋집으로 소쿠리를 옆에 끼고 갔다. 부부가 마당에 장미를 심고 꽃밭을 가꾸느라 밖에 나와 계셨다. 호기심으로 심었는데 식구들 입맛에는 안 맞아서 이웃들과 나눠 드시라고 들고 왔다고 하니 우리 또래의 순박하게 생긴 부부가 반기면서 채소 이름을 물었다. 루꼴라라고 말씀드려도 잘 모르셔서 몇 번이나 다시 물으시는 분들에게 참 미안했지만 맛이 맵다고도 말씀드렸다.


겉절이로 드시면 될 것 같다고 하니 남아공 그녀에게 가지 않아도 다 소비하실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상추나 더 심을 걸 왜 심었는지 모르겠다니까 자신들은 상추가 많아서 남는다고 좀 뜯어가라고 하셨다. 얼마나 반갑던지 루꼴라 소쿠리를 얼른 내려놓고 상추 밭에 앉아 안주인과 연신 상추를 뜯었다. 앞치마에 얼른 상추를 담고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집으로 왔다.


남편과 잔디를 깎을 준비를 하는데 조금 뒤 남편 분이 루꼴라 겉절이를 한 접시를 가져오셨다. 상추 겉절이 하듯이 무쳤다면서 수북하게 담아 오셔서  남편과 저녁 밥상에 올려 먹어 보았다. 씁쓸한 매운맛이 양념을 뚫고 올라와서 식초와 매실액을 더 넣어 무쳤다. 겨우 먹기는 했는데 루꼴라의 맛은 여전히 우리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새로 이사 온 이웃에게도 미안했지만 다음에 그 집에 안 심은 작물을 좀 나눠 드려야지 하는 다짐을 했다.   


이제는 루꼴라 지옥에서 벗어나 바질 차례가 되었다. 고르고 골라도 이젠 시들어서 그놈이 그놈 같은 무더기를 끝없이 나누며 자신의 미련함에 머리를 흔들었다. 겨우 바질만 따로 분류해 핸드 블랜더로도 갈아 보고 마늘 다지는 기계에도 가느라 부엌은 갈수록 초록 지옥으로 변해갔다. 물기 없이 말린다고 한참 뒀더니 시들시들한 바질은 작은 병으로 두 개 나왔다. 올리브 오일을 채워 지인에게 한 병 주려고 냉동실에 넣고 하나는 아침에 샐러드에 얹어 먹었다.


역시 못 먹을 바질 맛이었다.


내 속도 모르고 장미는 여전히 예뻤다.


    


 

작가의 이전글 시골 생활의 오월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