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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Jan 23. 2016

아는 게 병

집짓기에 대한 글

현장에서 아파트 시공을 하던 남편에게 시집 올 적에는 언젠가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지어줄 거라는 기대를 했다.


결혼 후 이십 년이 지나고 뜻하지 않게 암에 걸려서 나는 전원 생활을 앞당겨 하게 되었다.


이미 땅도 사놨고 돈도 마련해뒀다.


이제 남편이 짓기만 하면 되는데 이 남자 못 짓겠단다.


주택을 전문으로 짓는 업체에게 맡기면 되지만 믿고 맡길 사람이 없고, 자신은 일이 바빠서 직접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에게 맡기려니 믿음이 안 가고 자신이 하려니 바빠서 못 한다는 식이다.


남편은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으로 아파트 현장 소장을 할 때는 직원들이 힘들어했다.


그러니 집짓기는 어느 세월에 하려는지 모르겠다.


왕이면 내 집에서 편안하게 요양하고픈 나의 의지보다는, 쫒기듯 서둘러 집을 지을 순 없다는 남편의 고집이 이겼다.


남편의 직업이자 전문 분야인데 내 식대로 밀어부칠 수는 없는 게 집짓기라서 나는 그림같은 집을 꿈꾸다가도 그 꿈을 접어야할 처지가 되었다.


집짓기에 관한 일이 아니라면  뭐든 내 뜻대로 추진할 수 있으나 이것은 남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며칠에 걸쳐 의논하고 집을 지은 지인과 함께 대화도 나누었지만 아는 게 병이라더니 남편은 시공에 대해 잘 알고 있는만치 업체가  하는 말에 쉽게 동조하지 않고 자신만의 신념을 굽히려고 하지 않는다.


남편이 은퇴하여 자기 집을 지을 여유가 생기려면 앞으로 몇 년을 더 기다려야할 지 모르는데 나는 지금 황토방 구들에 군불을 지피고 툇마루에 앉아 해지는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동물 중에 자기 집을 손수 못 짓는 건 사람 밖에 없다더니 조그만 새조차 훌륭한 건축가인데 나는 새보다도 못한 존재인가 싶어 한심해지려고 한다.


저런 남편을 믿고 시집 온 내가 멍청한 건지, 암환자인 아내에게 집 하나 못 지어주는 남편이 무심한 건지 오늘은 남편 꼴이 보기가 싫어진다.


주말이라 시골집에 왔지만 남편과 나 사이에 흐르는 냉기는 바깥 날씨만큼이나 싸늘하다.


내일은 더 춥다는데 이러다 얼어붙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수도꼭지든 부부 사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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