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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Feb 12. 2016

다시 결혼한다면

사월이나 오월에 결혼식을 올렸으면 좋았을 것을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2월 중순이 뭐란 말인가!


결혼을 반대하던 부모님을 설득하느라고 겨울방학 동안 집안에서 콩쥐 노릇을 하며 눈치를 보다가 개학 직전, 극적인 합의를 보고 (잘 살든 못 살든 이제 다 내 할 탓이라는) 2주 만에 벼락에 콩 볶듯이 후다닥 준비를 하여 봄방학과 연결해서 결혼식을 올리느라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계절에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는 결혼하게 된 것만 좋아서 해마다 결혼기념일이 다가와도 이렇게나 아무 감흥이 없을 줄은 미처 몰랐다.


우리 시누이는  자기표현처럼 '신세 망친 날'이 4월의 어느 날이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자며 우리 부부도 초대를 받았는데 오마나! 따스하고 꽃향기 달콤한 봄밤의 외식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정작 시누이 내외는 서로 낭만적인 감정이라곤 없지만 말이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 부드럽게 휘감기는 예쁜 봄옷을 입고는 서울 근교로 차를 타고 가서 기분 좋은 식사를 하고 돌아온 그때, 나는 왜 '봄날의 신부'가 되지 않고 을씨년스러운 2월에 결혼을 했을까 거듭 후회를 했다.


봄날의 신부라는 낭만을 포기했다면 실속이라도 차릴 것을 백화점 할인 기간을 놓친 것도 두고두고 아깝다.


나보다 한 살 적은 큰집의 조카는 7월에 결혼했는데 백화점의 정기세일과 맞물려 비용을 대폭 아낄 수 있었다며 나중에 그 돈으로 스키복을 샀다면서 자랑했다.  


2월엔 겨울 옷은 몽땅 들어가 버리고 할인이 전혀 안 되는 비싼 봄옷만 나와 있어서 나는 호된 값을 주고 결혼 예복을 장만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게다가 직장으로 다녔던 학교에 2월은 일손도 안 잡히면서 정신만 산란한 달이다.


학교를 옮기기도 하고 새 학기를 준비하느라 우왕좌왕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때라서 심지어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기도 했고 지나간 뒤에야 아차! 했으니 이래저래 심란하기만 했다.  


이젠 은퇴하고 한가하니까 몸은 편한데 하루 종일 창밖으로 내리는 우중충한 비를 보니 저게 봄비인지, 겨울비인지 헛갈리니 며칠 뒤로 다가온 결혼기념일이 또다시 생각나면서 새삼스레 울화가 치민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것인가!


멋대가리라곤 없는 남편을 그래도 좋다고 박박 우기며 "사랑 하나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아버지를 설득할 땐 결혼만 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될 것 같은 확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딱 한 가지만 확실하다.


내 딸들이 결혼할 때 조건은 반드시 꽃 피는 춘삼월(음력으로 따지자면)에 할 것이며 데려오는 남자는 '니 할 탓이므로' 불문에 붙일 거라는 거다.


23주년 기념일인 다음 주 수요일엔 예전의 동료들과 저녁 모임을 정해 놓았다.


동료들이 그래도 결혼기념일인데 안 된다고 하는 걸 다른 날짜를 잡기가 어려워 내가 상관없다고 우겨서 그 날로 잡았다.  


이벤트라면 눈부터 휘둥그레져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데다 내가 깨우쳐 주지 않으면 기념일도 잘 모르고 넘어가는 남편이므로 그 날은 내가 동료들에게 커피라도 사면서 울적한 기분을 수다로 팍 풀 것이다.


남편이 만약에 뭐라고 한다면 나는 요즘 자주 써먹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 그랬어? 깜빡 잊었네. 어떡하지?"라고 백치미를 뽐낼 것이다.


그래도 다시 결혼한다면 이 남자와 할 것이니 그거면 결혼기념일 선물로 충분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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