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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Feb 17. 2016

결혼기념일이라서 어쩌라고?

결혼기념일에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다.


예전의 직장 동료들과 저녁 모임을 약속한 것도 모자라 남편에게 반란을 꿈꾼다는 발칙한 글을 암 카페에 올리기까지 했으니 아무리 이벤트라곤 모르는 남편이라도  결혼기념일을 따로 보내게 생겼다.


남편은 평소에 자기의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경상도 남자이지만 그 속엔 아내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지지가 있음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었는데 내 나이 오십이 되고 보니 나도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다.


사연은 이렇다.


지금 나는 단칸이라도 내 집에서 해질 무렵의 고즈넉함을 맛보고 싶은데 남편은 좀 더 근사하고 완벽하게 짓고 싶어서 서두르지 말자고 하기에 일단 내 마음을 접었다.


하지만 난 암환자이다 보니 하고 싶은 걸 미루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오직 지금이 중요할 뿐, 내일은 없다는 걸 어느 날 갑자기 별이 되거나 문득 상황이 나빠지는 주변의 암환자들이 끊임없이 내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지닌 돈에서 황토집을 조그맣게 짓기로 남편 몰래 결정해버리고 말았다.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남편에게 돈을 내놓으라고도 안 할 것이고 그동안 최선을 다해 필요 이상 남편 위주로 살아왔는데 이젠 그렇게 살지 않으려는 결심을  결혼기념일에 하게 되었다.




동료 네 명과 만나 월남쌈과 쌀국수로 저녁을 먹고 찻집으로 옮겨 늦도록 수다를 떨다가 이제야  돌아왔다.


세상 사는 그저 그런 이야기들을 분주하게 나눈 끝에, 내가 여행지에서 소원하던 비키니를 입었다가 딸들로부터 가슴이 무릎까지 처졌다고 놀림을 받았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한 동료가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남편에게 자기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꿀 테니 오백만 원만 달라고 했다고 한다.


동료의 남편은 이제 기업의 임원이 되어 아내에게 명품백이나 보석을 사주려고  마음먹었다는데 뜻밖에 고작 오백만 원으로 인생을 어떻게 바꿀 건지 물었다고 했다.


그 동료는 자기 인생에 숙원사업이 있는데 그건 바로 가슴확대술이었다고 한다.


자가 지방을 이식하기 때문에 외적으로 극적인 변화는 없으나 그냥 여기가 가슴이라는 위치만 표시해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동료의 이야기에 웃음이 터졌다.


가슴이 작아서 언제 가장 속상했냐고 물었더니 유방을 검진할 때 촬영하는 기계에 가슴을 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말에 나는 아예 탁자에 엎어져서 웃었다.


실컷 수다를 떨고 깔깔거리며 웃고 들어왔더니 남편이 밉던 사실도 잊어버리고 이 남자는 결혼기념일에 어디 가서 노느라 이 시간까지 귀가하지 않는지 들어오면 그거나 따져 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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