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던 그 시절
내게 책 읽기는 유일한 오락이었다.
아버지가 사다 놓은 열두 권의 한국문학전집은 전화번호부보다 두껍고 활자가 세로로 쓰인 것이었지만 나는 밥 먹을 때도, 과자가 생겨 형제들과 똑같이 나눠서 먹을 때도, 심지어 화장실 갈 때조차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하지만 화장실에 자주 들고 간 책은 어쩐지 꺼림칙하여서 밥 먹을 땐 손이 가지 않았다.
교복을 입던 중학교 등교 시간엔 두 손으로 스타킹을 신는 그 순간에도 눈은 소설책에 꽂힌 채였으니 작가들의 글을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나중에 도덕 교사가 된 나는 풍부한 독서로 인해 수업할 때 다양한 예화를 들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책 읽는 걸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씨알도 안 먹혔음은 물론이다.)
책 좋아하는 이가 그렇듯 자연스럽게 글 쓰는 것도 즐기게 되어 중학교 시절부터 써온 일기가 지금까지니 세월로 따져도 삼십 년이 넘는다.
십여 년 전부터는 비공개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마흔 후반의 나이에 암에 걸리게 되자 우연히 알게 된 암 카페에 <시어머니와 붕어빵>이라는 짧은 글을 올리게 되었다.
붕어빵을 유난히 좋아했던 내가 시어머니 눈이 무서워 마음대로 사 먹지 못하다가, 분가하고 난 다음에 이삿짐을 풀고 거리로 나가 맨 먼저 한 일이 붕어빵을 사 먹는 것이었는데 그 맛이 시어머니 눈을 피해서 몰래 먹던 바삭한 맛이 아니라 기름이 들어간 잉어빵이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던 내용이었다.
나는 암 카페에 처음 글을 올리던 그때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딸아이 표현처럼 '글로써 암을 극복'했다더니 내 속에 들어 있던 글쓰기의 욕구는 마침내 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삼 년의 시간 동안 이백 편에 가까운 글을 써서 올렸다.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의 흔적들을 뒤적이다 보니 의외로 많은 일이 있었고 그것들은 모두 글쓰기의 소재가 되어 암 카페에 낱낱이 까발려지니 많은 회원들의 공감과 응원을 받았다.
암에 걸리기 전엔 지루한 인생에 염증을 느끼며 불평불만이 가득했고 일기도 일상적인 기록 이상의 의미는 없었는데 '암'이라는 단 하나의 글자는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배를 가르고 위를 끄집어냈을 뿐인데 나는 봇물 터지듯 많은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글쓰기는 힘든 항암을 견디며 몸을 회복하는 동안 지속적인 즐거움을 내게 주었다.
암 카페에서 글쓰기의 내공을 쌓은 나는 브런치의 작가로까지 이름을 올렸으니 나로서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책을 낼 것도, 뒤늦게 작가로 입문할 것도 아닌 시시한 글쓰기지만 내 삶의 열정을 불사르기엔 이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음악가의 피가 흐르는 친가라서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악기 연주에 재주들이 있는데 나는 별스럽게 글을 쓴다고 내 동생은 핀잔이다.
그럼 어떤가?
소뿔도 각각이고 염주도 몫몫이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