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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Apr 14. 2016

내가 지지리도 못하는 것

나는 수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학력고사에서 40문제 중 내가 찍었던 4개만 정답이었다.

그러고도 대학에 갔으니 나는 억세게 운이 좋았다.


나는 방향을 가늠하지 못했다.

연애할 땐 지금의 남편에게 나는 지도를 보며 한 시간 동안 반대 방향으로 안내를 했다.

그때는 너그럽던 남편이 결혼 후 여름휴가로 강원도를 가다가 역시나 지도를 못 읽는 나를 보고 화를 내어 중간에 차에서 내릴 뻔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 속의 여자 말이라면 껌뻑 죽는 남편이지만 질투는커녕 진심으로 그녀가 고맙다.


나는 컴퓨터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직장에서 마지막으로 맡았던 보직이 정보부장이었다.

유능하고 성실했던 컴퓨터 전공의 직원이 새로 들어왔기 망정이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지금도 스마트폰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숫자나 지도를 보면 머리 끝이 쭈뼛 서며 긴장을 한다.


내가 잘 하는 건 처음 보는 사람과도 거리낌 없이 친해지는 웃음 따위가 아닐까?


좋게 말해 친화력이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주책없게 변할까 봐 무척 조심하고는 있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예전엔 저렇게 못나빠진 내가 밉고 싫어서 견딜 수 없을 때도 많았는데 이제는 '뭐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도 세 끼 밥 잘 먹고 사는 덴 지장 없으니 상관없지 않은가 하는 뻔뻔함까지 더해져 이것도 자랑이라고 브런치에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농사를 지어보면 똑같은 씨앗을 심지만 어떤 것은 실하고 어떤 것은 약하며 제각각인 모양으로 자라는 것에서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


글 좋아하는 사람은 숫자에 어둡고 계산이 느리니 둘 다 잘하는 사람은 내 앞에서 대놓고 잘난 척해도 널리 이해하련다.


그런데 브런치의 작가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 같아서 내가 암에 걸려 용감무쌍해지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숨기고 말 안 했을 텐데 지금은 나 못난 것도 이렇게 까발릴 수 있다.


어제 암 카페에 올라온 투표 관련 덧글엔 다음 선거까지 살 수 있을까 하는 내용이 있었다.


건강한 사람에겐 당연한 투표지만 다음번 검진까지만 보장되는 암환자의 삶이다 보니 4년마다 도장 한번 찍는 것도 눈물 나는 일이 되고 만다.


그 밑의 덧글엔 앞으로 총선 열 번만 더 찍자는 응원이 이어졌다.


수학을 못 하면 어떻고 지도에 까막눈이면 어떤가.


세상은 이렇게 조금씩 나아져가고 내 삶은 봄이 오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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