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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Jun 08. 2016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법

이제는 동지애로 똘똘 뭉친 부부지만 나는 여전히 내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


남편과 내가 이성이라는 사실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남녀 화장실로 각각 떨어져서 들어갈 때에만 깨달을 수 있으나 여전히 남편은 내게 사랑스러운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딸들의 속옷도 세탁기에 맡겨버리는 무심한 엄지만 유일하게 남편의 얇은 셔츠는 손으로 빨아서 다리미로 싹 다려놓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것 뿐인가.


국과 나물을 좋아하는 남편의 식성 때문에 내가 가장 신경 써서 조리하는 것도 그것이라서 아이들이 엄마는 맨날 같은 것만 한다고 불평한다.


며칠 전에는 남편이 전기면도기의 날을 새로 갈아달라고 하기에 아침마다 면도를 해야 하는 남편을 생각해서 그날로 백화점에 가서 날을 교체하여 화장실에 도로 갖다 놓았지만 남편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가끔 나의 공치사를 할라치면 남편은 "나도 당신 눈치를 얼마나 보는 줄 아느냐?" 따위로 대답을 하니 아마도 남편은 언행이 거친 나와 사는 게 억울한 게 틀림없다.


이건 밝히기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몇 년 전, 남편이 치킨 가게를 시작할 때 있었던 일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사를, 그것도 먹는 장사를 하려니 모든 게 생소할 뿐이라서 남편과 나는 한동안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주방 바닥을 청소하는 데 쓰는 플라스틱 빗자루가 필요했는데 그것을 사러 갈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도덕교사였던 나는 학교에서 쓰는 빗자루 하나를 몰래 훔쳐왔다.


그걸 두고 옆집 빵가게의 남자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남편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판 여인의 심정으로 나의 양심을 팔았으나 그 여인은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았지만 나는 국민의 세금인 공공재를 도둑질한 까닭인가?


남편의 첫 사업은 쫄딱 망했다.


지금도 남편의 친구는 그 시절을 회고하며 남편에게 가장 헌신적인 아내로 나를 꼽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토록 남편을 위해서라면 온몸을 던으나 내게 돌아온 건 암밖에 없었다.


암수술하고 나서 퇴원한 직후에도 아픈 배를 움켜쥐고서 남편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니 남편을 향해 "환자가 마련한 음식을 먹으려면 이 정도 원망은 감수해야지!"라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그랬더니 남편은 "누가 그렇게 음식을 하라고 했냐?"라고 응수했고 나는 "그러면 누가 할 건데?"라며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집안일에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남편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내가 가장 힘든 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양평의 시골집에서 쓰레기며 음식 등을 이고 메고 들어와 서울 집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내가 없는 집안 꼴은 치울 것만 어찌 그리 눈에 쏙쏙 들어오는지 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마치 불나방처럼 온 집안을 휘몰아쳐야 한다.


삼십 분 정도 광풍이 몰아치고 나면 비로소 집안은 윤기와 함께 평안이 찾아와서 긴장했던 식구들도 모두 안도의 한숨을 다.


남편과 두 딸은 그 시간만 견디면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안락하고 쾌적한 의식주를 제공받을 수 있으니 찍 소리 없이 잘 버티며 의 짧은 분노가 지나가기만을 숨죽여 기다린다.   


나는 남편을 향한 불붙는 애정을 그를 살뜰히 보살피는 것으로 대신하지만 늘 그렇듯 거친 나의 말과 억센 몸짓이 그 공든 탑에 물을 끼얹고 만다.


내 휴대폰에 저장된 남편의 이름은 '사랑하니까'이다.


원래는 '사랑했는데'인데 딸들의 교육상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서 다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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