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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Dec 20. 2015

청춘이여 안녕

절한 발라드가 온 심금을 울릴 때 떠올리는 한 남자가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나 <노트북>같이 일생에 한  번뿐인 사랑 이야기를 볼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운 좋게 그의 꿈을 꾼 날은 하루 종일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느낄 수 있다.


달콤하고 폭신해서 아껴먹는 솜사탕 같은 그 이름은 첫사랑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전학 가자마자 부반장을 맡아서 여자애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받고 있을 때, 교실 청소를 혼자 하고 있는 나를 도와준 우리 반 반장이 내 첫사랑이다.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이어진 사랑은 그게 첫사랑이어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서툴고 어색하고 진지하기만 해서 도무지 편치 않던 기억들


어쩌자고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부끄럽고 어쩔 줄 모르겠는지 편지로는 온갖 이야기를 쓰면서도 정작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고 헤어지고 말았다.


봄이었다.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어느 봄날 그 애는 내게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주며 마지막 선물이라고 했다.


"어떤 놈이든 너를 울리는 녀석은 가만 두지 않겠다"하면서 오늘만큼은 먼저 가겠다는 그 애는 내게 등을 보이고  돌아서 갔다.


버스 안에서 무릎에 꽃을 얹은 채 나는 이게 내 인생에 잘한 결정인지, 후회할 결정인지 몹시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저 애만큼 나를 사랑해 줄 남자를 또 만날 수 있을지 그게 가장 두려웠다.


봄비가 올 때면 어김없이 그 시절이 떠오르면서 일손을 놓고 하염없이 추억에 잠기게 되었다.


직장에서 잠깐 일을 못 하고 있어도 봄비가 자주 오면 좋았다.


내가 몇 살이든 상관없이 스무 살이 갓 넘은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봄비가 와도 첫사랑 생각을 안 하게 된 건 올해였다.


양평에 텃밭을 구해 농사를 지으면서 봄비는 그저 모종에게 촉촉이 물을 뿌려주는 고마운 비였다.


세를 얻어 살고 있는 집에서 백 미터나 되는 기다란 호스를 끌어다 밭에 물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은 부침개나 해먹으면서 모종들이 비를 맞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창 너머로 보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 비를 맞고 모종들이 자라서 열매를 매달게 되었을 때, 나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세상에 봄비가 그리 자주 왔는데도 나는 한 번도 첫사랑을 떠올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몸은 노화의 신호를 본격적으로 보내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늙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몸과 마음이 완벽하게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동생이 서른 다섯이 되자  "언니! 이젠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기분이 들어."라고 말했는데 나는 젊지 않은 게 아니라 마침내 늙고 말았다는 자각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손수 길러 따먹는 텃밭의 채소가 아무리 싱싱한들 나의 청춘과 감수성을 지켜주던 든든한 보루인 첫사랑을 밀어내다니!


하지만 이 겨울이 지나가고 또 봄이 오면 나는 밭에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으며 작년보다 더 실하게 길러 먹어야지 하고 입맛부터 다시고 있을 게 뻔하다.


마흔 아홉인 나는 이제 늙었다.


청춘이여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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