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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Aug 11. 2016

그때 그 더위

1994년 만삭의 임산부는 아침 출근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이를 앙다물고 각오를 한 뒤에야 찜통 같은 직장으로 나설 수 있었다.


퇴근하고는 스무 평의 임대아파트에서 베란다의 방충망 사이로 코를 내밀고 한 줄기 바람을 기대하며 눈물을 삼켜야만 했던, 그때 그 더위는 결코 잊을 수 없다.


내 한 몸으로도 따뜻한 난로를 가득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9월 중순이 넘어가자 천지를 태울 듯한 무더위도 결국 기세가 꺾여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찬바람이 불면서 마침내 폭염이 물러가고 가을이 왔다.


그다음 해에 에어컨을 샀으나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더위는 오지 않았다.


시월  중순에 낳은 첫째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올해 더위도 그 시절만큼이나 만만치 않게 사람을 힘들게 한다.


7말 8초의 급박한 폭염에 일상은 거의 정지한 상태로 아무에게도 연락 오지 않고 만나자는 약속도 좀 시원해진 다음에 보는 걸로 모두 미뤄졌다.


집안에서 가스불을 켜고 요리할 때는 한바탕 땀을 쏟을 각오를 한 뒤 한꺼번에 서너 가지를 후딱 해치우곤 한다.


요즘 남편은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리얼과 토스트 따위로 아침을 때운다.


과일과 주스를 함께 차려주했지만 워낙 더우니 밥 밖에 모르는 남편도 아무 말없이 삐쩍 마른 식빵에 버터를 발라가며 입맛 없는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낮에는 더워도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면 좀 살기가 나은데 밤이 늦어도 후끈한 열기가 가라앉지 않을 땐 스트레스가 쌓이게 된다.


에어컨을 별 수 없이 약하게라도 틀고 자정까지 버텨보지만 이젠 또 전기요금 걱정으로 시름에 겨운 잠을 청하게 되니 폭염과 혹한은 서민들에겐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지난 주말엔 경주 한화콘도에서 시댁 형제 모임이 있었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 해마다 여름휴가에 세 남매 부부가 모여 일박을 하는 행사를 몇 년 동안 해왔다.


그동안 밥을 사 먹었지만 큰집 형님이 재작년에 대장암 수술을 하셔서 가급적이면 해 먹었으면 좋겠다는 시숙의 의견에 따라 시누이가 몇 가지 반찬을 하고 시장을 함께 봐서 두 끼를 숙소에서 만들어 먹었다.


손끝 야무진 시누이 덕분에 편안하게 얻어먹고 왔지만 이미 평균 연령이 60대인 일행이라 짐을 나르는 등 힘을 많이 써야 해서 나는 다시는 하지 말자고 했다.   


폭염에 밖에 다니는 것도 힘들어서 주로 숙소에서만 지내고 박물관만 간단히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창원에 사시는 시숙 내외는 버스를 타고 돌아가기로 되어서 시외버스터미널에 여섯 명이 차에 끼여서 탔다.


남편은 주차를 하러 가고 나머지 일행은 버스표를 끊고 터미널 안에 있는 커피숍에 모여 한 시간 넘게 남아있는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문제는 남편이 이십 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형과 형수, 누나까지 왜 안 오느냐 걱정을 시작하더니 전화를 해도 통화 중이니까 형수는 찾으러 가겠다고 나섰다.


원래 업무 전화를 하면 오래 붙들고 있는 남편이고 별 탈없이 잘 올 사람인데도 막내가 그렇게 걱정이 되는지 야단법석인 시댁 형제들을 보니 그제야 나는 남편이 왜 저렇게 응석이 심한지 알게 되었다.


식탁에 새 반찬이 없으면 그만 시무룩해져서 힘없이 숟가락질하는 남편


새 옷을 필요하다고 그냥 말하면 될 텐데 꼭 한탄을 해가며 옷 사달라는 남편


어디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다 나을 때까지 반복해서 증세를 말하는 남편


자신이 힘들면 한숨을 쉬며 우거지 상을 하는 남편


그렇다!


남편은 저들의 사랑스러운 막내인 것이다.


결혼을 결심할 땐 막내라는 점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고 친정엄마도 막내는 아무도 달라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며 지지해주셨는데 내가 좋자고 선택한 막내엔 이런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줄 그때는 몰랐다.


역시 막내인 아버지와 결혼한 엄마는 이제야 말씀하신다.


"막내는 온(원래) 짠단다.(징징거린다.)"


막내며느리지만 시어머니 봉양도 해야 했고 시댁 행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해 준 고마운 남편


하지만 이번 추석부터 큰집에 가지 않기로 되었다.


큰집에선 제사를 없애기로 했지만 조카가 대신 맡는다고 선언하여 우리는 명절에 큰집에 가지 않고 양평에서 조용히 보내면 된다.


막내인 남편이 얄미울 때가 많지만 그렇게 자란 사람인 줄 알고 선택한 남편이니 앞으로 징징거리면 한 대 콕 때려주는 걸로 고마움을 전할까 한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가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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