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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Mar 14. 2017

금식과 아귀탕

4년 정기검진을 받았다.


위가 없는 사람은 금식 시간이 좀 길어서 검사 전날 아침에 미음 한 그릇 먹고 나면 계속 굶어야 한다.


이번엔 대장내시경까지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장 청소를 위한 물을 3리터나 마셔야 해서 한 달 전부터 슬슬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6개월 전에 예약을 해도 내시경 검사는 오후 시간밖에 없어서 슬픈 금식은 당일 오전 동안 이어져 했다.


걱정을 미리 잔뜩 하면 역시 실전은 생각보다 쉬운 법이다.


전기 핫팩으로 배를 뜨뜻하게 지져가며 물을 마셨더니 의외로 술술 잘 넘어가서 토를 하거나 몸서리치는 일은 없이 두어 번 헛구역질하는 걸로 몽땅 다 마실 수 있었다.  


암환자는 수술과 항암 못지않게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정기검진의 부담도 꽤 크다.


CT 조영제를 넣는 주삿바늘은 두꺼워서 주사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음에도 움찔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두 번 찌르는 낭패를 겪지 않는다.


이틀에 걸친 검진을 끝내고 나니 홀가분해져서 뿌리가 파 보기 싫던 치아도 때우고, 부쩍 침침한 눈도 검사해보려고 안과까지 두루 거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검진을 앞두고 주말엔 굶어야 해서 양평에 안 가려고 했는데 집 지은 이후로는 누가 떠 메어 갔나 싶은지 남편이 자꾸만 채근을 하니 결국 몸을 일으켜 따라나섰다.


도착해보니 우리 집의 옆 땅은 토목 공사를 하느라 포클레인으로 돌을 옮기고 흙을 채우느라 온통 야단이었다.  


우리 땅의 주인이기도 했던 이가 이백 평의 땅을 잘 다듬어서 팔 생각인데 저렇게 돌을 쌓아 경계를 예쁘게 다듬어 놓으면 곧 임자가 나타나서 팔릴 것도 같다.


공사 소음으로 낮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고는 냉장고에서 김치와 오징어채를 꺼내고 냉동실에 있는 시래깃국을 녹여서 금식 전 마지막 식사로 부실한 저녁을 먹었다.


이튿날 나는 쌀미음을, 남편은 라면을 끓여 초라한 아침 상을 차렸다.


점심때부터 나는 굶고 남편은 내가 끓여 놓은 미음과 남은 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산 중턱에 집 지어 사는 이웃에게서 반가운 연락이 왔다.


저녁으로 아귀탕을 끓일 건데 둘이 먹느니 우리까지 와서 식사를 함께 하자는 연락이었다.


처음엔 금식을 이유로 거절했으나 나 때문에 못 얻어먹고 있는 남편을 생각해서 초대에 응했다.


약속한 여섯 시가 가까워오자 남편은 신이 난 표정으로 문단속을 하기 시작하더니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골에 살다 보면 가장 그리운 것이 사람이 된다.


말이 잘 통하는 유쾌한 사람과 교제가 절실해지다 보니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이웃의 초대를 받아 잘 차려진 식사에 염치도 없이 끼여 앉아 얻어먹곤 했다.


초대의 대가는 적당한 수다와 신나는 웃음이면 된다.


그 이웃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부부 둘 다 마음에 들기가 어려운데 우리 부부가 그렇다고 하고, 나 같은 며느리를 얻었으면 한다는 최고의 칭찬을 해주셨다.


그런  듣고 나니 내 멋대로 떠들어대던 나는 갑자기 조신해져서 행여 실망을 끼칠까 봐 언행을 조심하게 되었다.


남편은 물 좋은 아구로 맑게 끓인 국을 한 그릇 찰찰 넘치게 받아서는 입 속에서 기가 막힌 솜씨로 뼈만 발라내며 후루룩 잘도 먹는다.


나는 물 한 잔 받아 놓고 군침이 넘어갈 때마다 한 모금씩 목을 축이다 보니 어느새 큰 잔이 다 비어 있었다.


남은 국물에 칼국수를 끓여 남편은 그것도 한 그릇 가득 먹고 후식으로 조각 파이에 연하게 내린 커피까지 얻어먹으니 마치 계 탄 것처럼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세월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지나온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해서 온갖 소재로 두세 시간 웃으며 얘기하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지나가는지 모른다.


나는 블로그나 카페에 글을 오랫동안 써왔기에 이야기마다 기억이 생생하게 나서 그린 듯이 장면을 묘사할 수 있다.


기분이 좋은 날엔 '빵빵 터지는' 입담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걸 좋아한다. (으이그 자랑이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둔 덕분으로 주말이면 솜씨 좋은 이웃으로부터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이번엔 굶어서 홀쭉해진 배로 앉아 있는데 혼자서 찹찹 거리며 잘 먹는 남편을 보니 기분도 나지 않아 주로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왔다.


평소엔 잊고 있다가도 불편하고 번거로운 검진을 받을 때면 암환자의 처지가 떠오르며 서럽기도 하고 울적해지기도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니 오늘 저녁은 둘째가 감자탕을 끓여달라고 해서 돼지등뼈를 물에 담가 놓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검진 결과가 나오는 일주일 뒤엔 혼자서 아귀탕을 열심히 먹은 남편으로부터 미뤄놓은 생일 선물을 톡톡히 받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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