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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Apr 24. 2019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을 마냥 쳐내기만 하는 나에게

다이어리는 늘 빼곡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참 많았다. 사실, 뭐 이런 것까지 적어야 하나 싶은 항목들도 있었다. 지금 안부 인사를 묻지 않으면 또 몇 개월이 지나갈 수도 있기에, 오늘은 꼭 잘 지내고 있냐고 물어보고 싶은 친구의 이름도 리스트에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마저도 이렇게 적어두지 않으면, 내일 이 시간쯤 갑자기 생각이 나서 ‘어제 왜 하지 않았을까’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갑자기 생각난 일을 바로 처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일은 내일의 항목들이 또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 중요한 일의 기준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체크리스트의 항목들을 몇 가지 지우지 못한다고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다이어리는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위해서 구입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올 한 해, 매일 열어봐야 하는 다이어리를 결정하는 것은 연말이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이벤트였다. 그런데 그렇게나 신중하게 구입했던 다이어리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차원을 넘어서, 오늘의 페이지를 수시로 펴고, 해 낸 항목들을 체크하고, 아직 남은 항목들이 몇 가지나 남았는지를 확인하는 ‘인증서’로 변해갔다.


오늘의 페이지에 있는 모든 항목들에 줄을 긋고 남아 있는 항목들이 하나도 없음을 확인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때는, 좋았다. 뿌듯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루라는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해 스스로가 대견했다. 내일은 몇 가지 항목들을 더 늘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쳐내는데 집중하다 보니 이게 과연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인지 자꾸 의심이 들었다. 물론, 초기에는 그 의심의 마음을 꾹꾹 눌러내기 바빴다. 내가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해내고 있는데, 뭘 잘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의심의 시선은 to-do-list의 항목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은 매번 뒤로 미뤄지게 되더라. ‘단순한’ 일들이 ‘많이’ 오늘의 리스트에 올라왔다. 단순한 일이기에 빨리 쳐낼 수 있었고, 덕분에 많은 일을 끝마친 하루라는 자부심이 들었다. 그 리스트들은 매일매일 비슷했다. 굳이 새로 쓸 필요도 없이, 복사하기+붙이기만 해도 될 법한 리스트들이었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단순한 일들을 많이 쳐낸다고 내가 자랑스러울 것 같지는 않았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가 싫어서 리스트를 만들어 체크하겠다는 계획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나를 인도했다. 더 빨리 반복되는 하루였을 뿐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같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해낸다는 ‘양적인’ 성취감이 아니다. 그런데 멀티 플레이어를 강조하는 지금의 분위기에서는 ‘양적인’ 효율성이야말로 시간을 제대로 운영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단순한 일을 많이 한다. 시간 운영을 쉽게 하려고 한다.


사실, 중요한 것은 퀄리티 높은 성취감이다. 슬프게도, 그 성취감은 매우 어려운 편이다. 퀄리티로 승부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보고 ‘전략’을 세울 줄 알아야 한다. 생각과 전략을 토대로, 오늘과 내일이 달라야 하고 변화와 발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쳐내기만 하는 하루에 어떤 변화와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시간의 효율성과 시간 운영에 관심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하수의 시간 운영 방식이었다. 조직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생각을 하고 전략을 세우는 일은 직급이 높을수록 맡게 되는 임무다. 내 인생을 운영하는 것인데, 내 인생의 주인인 내가 말단 직원처럼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체크리스트를 보며 쳐내기보다는, 생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해 보기’라는 항목은 좀처럼 줄을 그어 완료했음을 표시하기에는 어려운 항목이다. 오늘 다 끝내지 못하고 내일로 넘어가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오늘의 체크리스트를 지우고 있었던 것인지, 어떤 목표가 있었기에 오늘 이렇게 책을 열심히 읽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다.


내가 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왜 지금 이 책을 읽고, 내가 왜 공부하고 싶으며, 내가 왜 지금 글을 쓰고 있는지 그 “왜”를 언제나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혹여 목표가 중간에 수정되거나 아예 다른 방향으로 바뀔지라도, 큰 깃발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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