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을 읽고
약속이 있어, 판교역에 내렸다.
자주 가는 곳은 아니다 보니, 판교역에 내려 버스 타는 곳을 찾기란 매번 어렵다. 검색을 해 보면 버스로 고작 몇 정거장만 가면 되는 거리인데, 그 버스를 타는 정류장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리저리 헤매다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N 건물로 갈게요. 앗, 저쪽에 있구나~”
목적지를 얘기하자마자 약속 장소를 발견하고는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백발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 없이 택시를 타면서 할아버지 기사님은 많이 만났지만, 할머니 그것도 백발의 할머니 기사님은 처음 만났다.
백발의 머리를 세련되게 관리하시는 것으로 보아, 기사님은 지금까지 생각하던 ‘할머니’의 이미지는 아닐 것 같았다. 할머니 기사님의 첫마디는, 역시나 달랐다.
“가까운 거리지. 카카오 자전거 타지 그랬어.”
“카카오 자전거가 뭐예요?”
할머니는 백미러로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만, 진심으로 궁금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연기하는 거지?”
짧지만 강렬한 저 질문이 왜 그렇게 나를 창피하게 만드는지, 정말이지 백미러에서 보이지 않는 자세로 고쳐 앉고 싶었다. 카카오 자전거를 진짜 모른다며 끝을 흐리는 내 대답에, 할머니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플 깔아. 내 주변 어디에 카카오 자전거가 있는지 다 확인할 수 있어. 타고 아무 데나 내려놓으면 돼. 30분에 천원이야. 저녁에는 카카오에서 다 수거해가는 것 같더라고. 충전을 해야 한대. 이게 다 전기야.”
할머니 기사님과의 5분도 채 되지 않는 대화 속에서,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는, 같은 나라에 살고 있어도 신세계를 경험하는 듯한 IT 서비스의 발전이었다. 아무 곳에나 자전거를 놔둬도 다음 사람이 찾을 수 있다니, 그 편리함이 너무 신선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더 큰 충격이었는데, 할머니한테 어플을 깔으라는 충고를 듣고 새로운 기술을 소개받았다는 점이다. 차가 잠시 정지할 때면, 빨간색 스테인리스 컵에 담긴 차를 우아하게 마시던 할머니에게서 말이다. ‘아이 키우느라 바빠서 몰랐어요’,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몰라요’ 류의 변명은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할머니 같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조건>을 보면, 노년이 되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의 습관들을 소개한다. 하버드 졸업생들을 위주로 무려 72년간이나 추적 조사하며 얻어낸 삶의 지혜들이다. 책 속의 많은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8장, ‘삶을 즐기는 놀이와 창조의 비밀’이다. 여기서 ‘은퇴’라는 이슈가 언급된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이 탓에 형식적인 은퇴는 하였지만 여전히 출퇴근을 하고 싶어 하시는 어른들이 보인다. 한창 젊을 때는 그렇게나 싫었던 출퇴근이, 더 이상 그만 일해도 좋다는 사회적 허락을 받게 되는 나이가 되면 놓치고 싶지 않은가 보다. 하지만, 은퇴 후에도 계속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일에서 존재를 확인하였고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셨던 분들이다.
책에서는, 은퇴 후 사망하기까지의 기간이 한 세기 만에 평균 3년에서 15년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간을 ‘제대로’ 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은퇴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75세에서 80세 사이에도 여전히 일을 하는 하버드 졸업생들은, 여전히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l 그냥 있기가 너무 지루해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l 나는 도전과 사람들과 돈을 좋아한다.
l 일을 하는 것이 마냥 즐겁고, 아직도 사람들은 나에게 기꺼이 급여를 지불한다.
l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예전보다 더 어려운 임무를 맡을 것이다.
l 젊은 동료들에게 아직 내가 필요하다.
l 작가는 글을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나의 천직은 교사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을 가르친다. – 311p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평생토록 배워야만 한다. 배우는 것은 언제나 고통이었는데, 이들은 즐겁게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배웠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피하고만 싶던 그 시절을 부끄럽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 나에게는 언제 올까? 그 순간이 오면 나이가 들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현명해졌다는 뜻일까?
운이 좋게도 그 할머니를 만났기에, 공부가 싫다고 말했던 그 시절이 벌써 부끄럽게 느껴진다.
우리는 쉬기 위한 준비에 열중한다. 멈추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한다. 그러한 삶이 부럽다. 하지만, 지금의 이 순간을 오히려 소중하게 여기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미래의 나일지도 모른다.
지금 달리는 것이 벅차다면, 속도만 조절하면 된다.
그리고 언제 멈춰야 할까는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닐 수도 있다. 꼭 멈춰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답을 얻었기 때문이다.
내가 백발 머리가 되었을 때도, 한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나도 그 날의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이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것은, 이제 나에게 하나의 행복의 조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