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지적 허영심에 빠져 있는 것일까
영어 학원에 뉴 페이스가 등장했다. 그런데 나에게만 뉴 페이스다. 1년 정도 쉬었다가 다시 등록을 하신, 오랜 멤버 중 한 분이었던 것이다. 워낙 캐릭터가 강해 보이시는 이 분은 영어 공부를 왜 하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매우 유창하셨다. 게다가 요새는 정말이지 어르신들의 나이를 도무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관리를 잘하시는 분들이 많다. 역시나,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하시는데 영어를 왜 배우시냐는 나의 질문에,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본인의 나이쯤 되면 영어 학원을 이렇게 장기간 등록하고 다니는 것을 서로 지적 허영심이라고 한다고 말이다. 영어를 너무 잘한다는 칭찬에 겸손의 표현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지만, 나는 그 ‘지적 허영심’이라는 단어가 무섭게 마음에 꽂혔다.
지적 허영심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허영심이 속은 빈 상태로 겉치레에 들뜬 상태를 뜻하는 만큼, 지식이 많다 혹은 지식을 쌓고 있다는 ‘척’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무섭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나 역시 지적 허영심에 휩싸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취업 준비를 한다며 토익 학원을 들락날락하던 시절 이후 다시 영어 학원을 찾은 이유는, 당연히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이틀을 투자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일주일 내내 아침이 바쁜 엄마라는 것을. 그런데 막상 학원에 앉아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영어에 투자하는 시간이 없다. 전혀. 복습도 없고 평소 읽거나 듣는 영어 미디어 하나 없으니, 수준의 변동은 없다. 잊었던 것을 기억하고 유지하는 수준 정도라는 것이다.
영어뿐이랴.
일주일에 책 한 권은 읽으려고 노력한다. 올 상반기에 처음으로 독서 모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비록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시간적 제약에 오프라인으로 토론까지는 진행할 수 없지만, 그 느낌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이어서 읽을 책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독서의 습관이 끊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다음 책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책을 읽은 후 글로도 남기고자 한다. 서평까지 남기고 싶지 않은 책들도 더러 있지만, 스스로 선택해서 읽은 책들인 만큼 배울 것이 전혀 없는 책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독서를 좋아한다는 것 역시 주변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만 보아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서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책을 제대로 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그대로 책장에 넣어두기만 하니, 시간이 흐르면서 책을 읽었던 기억조차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서평을 쓰니, 책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볼 수 있고 거기에 내 생각까지 더할 수 있어, 책에 대한 기억이 더 풍성해졌다. 그런데 이 또한 뭔가 부족했다. 독서를 통해 내 생활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읽은 ‘팩트풀니스 (FACTFULLNESS, 한스 로슬링)’은 간극 본능, 부정 본능, 직선 본능, 공포 본능, 크기 본능, 일반화 본능, 운명 본능, 단일 관점 본능, 비난 본능 그리고 다급함 본능이라는 10가지 본능이 세상을 오해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소위 많이 배우고,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에 대해 모르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작가는 스스로를 ‘가능성 옹호론자’라고 했는데, ‘이유 없이 희망을 갖거나 이유 없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리고 사실에 충실하자고 조언한다.
지적 허영심을 이야기하다가 이 책을 언급하는 이유는, 많은 배운 사람들이 세상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본능 때문에 배우고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조차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하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그들 역시 지적 허영심에 물들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너는 왜 그렇게 영어 공부를 하고도 못하냐?”
“너는 왜 그렇게 책을 읽었으면서도 나아진 것이 없니?”
“너는 그렇게 책을 읽었으면서 왜 그것도 모르니?”
주변 사람들 모두 내가 책을 많이 읽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내가 저런 식의 말을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이것만큼 창피한 순간도 없을 것이다.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은, 나는 하는 척만 했지 시간만 낭비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내 생활과 연결되지 않는 공부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하는 공부가 내 삶에 진정 영향을 끼치려면, 공부도 제대로 해야 한다. 뭐든 제대로 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하던데, 지금 내가 하는 공부는 그다지 어렵지가 않다. 할만하다. 아니, 때로는 쉽다. 학원만 왔다 갔다 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나도 지적 허영심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지 반성해 본다. 공부를 하고 있는 척은 하기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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