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생각들' 오원 저 /생각정거장
사람은 누구나 멀티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 '평소의 나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이나 캐릭터’를 뜻하는 ‘부캐’라는 단어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지만, 사실 부캐는 지금 이 시기에 갑작스럽게 툭 튀어나온 현상은 아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 보이기도 하고, 관심사도 달라진다. 주고받는 에너지에 따라 힘의 균형을 만들지 못하면, 우위를 점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밀리거나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를 적극적이고 활발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누군가는 나를 조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때는 힘의 균형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그래서 내 모습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하고 싶은 일은 손을 아무리 뻗어도 잡히지 않는 곳에 있었고, 매일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앉아 있으려니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매일, 집으로 가는 방향과는 반대인 지하철 정류장까지 걸었다.
똑같은 시간대였지만, 날이 밝으면 밝은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좋았다. 걸었던 길은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를 벗어난 곳이었고, 그래서 그곳을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간혹 날씨가 좋으면 목표로 삼았던 정류장을 지나쳐 더 걸었다. 더 걸으면 아파트 촌이 등장했는데, 이 거리를 중국 상하이라고 생각하면서 걸었다. 한창 중국어를 배우던 시기에 두 번 방문했던 상하이는 설레는 장소였고, (서울에서도 매일 보는 빌딩 숲이지만) 그 곳의 빌딩 숲은 뭔가 특별하게 여겨졌다.
상상하며 걸었던 나름 즐거웠던 시간이었지만, 어두웠던 하루에 빛이 되었던 순간들은 근무 환경이 바뀌면서 잠깐 누렸던 취미로 끝나버렸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상상하며 산책을 ‘걸은’ 기분은 어땠을까.
‘걷는 생각들 (오원 저 / 생각정거장)’의 저자는 무려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자신을 돌보는 마음을 품고 매일 아침, 짊어진 가방도 없이 가볍게, 순례길을 산책했다.
그저 맘에 들지 않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산책을 했던 나와는 달리, 저자는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 산책을 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 걸었는지 궁금해서 그녀의 생각의 흐름을 함께 따라가자니, 쉽게 지나치는 ‘일상의 물건들 (건물이나 가게, 꽃이나 나무 등 항상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 것들)’에 누군가는 애정 어린 시선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당연한 것은 없다며 반복되는 일상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소홀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도 동시에 들었다.
그녀의 생각들과 함께 걸으며, 숨기고 싶은 마음을 들킨 듯한 뜨끔한 순간들도 많았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들에 많은 부분 공감할 수밖에 없었고, 아울러 나 역시 그녀가 생각하는 인간관계의 씁쓸함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싶어서.
산책을 마치고 책을 덮자니, 이 세 단어가 남는다.
‘나’, ‘일상’ 그리고 ‘외로움’.
평생 내가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 세 단어들을 마주하며, ‘일상을 더 소중히 여기고, 외로움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많이 배우고 싶고 좋아하는 ‘언니’를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서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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