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된 것은, 원하는 장난감을 손에 쥐어주었다고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장난감과 함께하는 2라운드에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펼쳐지곤 한다.
뽀로로에 푹 빠져있던 아이가 마트의 장난감 코너를 지날 때마다 애니메이션 슈렉의 고양이 눈빛으로 쳐다보는 탓에, 결국 뽀로로, 크롱, 패티, 루피 모양의 작은 인형들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즐거움은 잠시, 집에 오자 아이는 곧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네 개의 인형을 모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싶은데, 다른 캐릭터들과는 달리 꼬리가 있는 크롱이 자꾸 옆으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몰래 준비한 손수건으로 잽싸게 크롱을 똑바로 눕힌 후에야 아이의 짜증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물원에서 한시도 놓지 않았던 돌고래 모양의 풍선은 집에 와서 골칫거리가 되었다. 돌고래를 베개 삼아 눕고 싶은데 자꾸 움직이고, 껴안은 채로 잠들고 싶은데 손에 힘이 조금만 빠져도 붕 떠버리고, 눕혀놓고 토닥토닥 해주고 싶은데 도통 누워있지 않고 자꾸 서 있으니, 40분이 훌쩍 넘도록 눈물바다다. 만원이나 주고 산 풍선인데, 터뜨려버리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는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왜 너는 재밌게 놀지 못하는지 질책하기에는, 사실 나도 그럴 자격이 없다. 원하던 것을 얻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나이 들어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오랫동안 연애를 하다보니 주변에서는 우리가 결혼하기를 원했고, 나 또한 결혼을 원했다. 결혼을 했다. 이번에는 주변에서 아이를 갖기를 원했고, 시간이 지나자 우리 역시 아이를 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가 되었다. 주변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한 단계씩 밟고 올라섰지만 매번 그 문을 열고 걸어갈 때마다 힘들고 만족스럽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거나, 원하던 것에 수정 사항이 생겼거나.
다행히도, 원하던 것에 수정 사항이 생긴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한다는 것은, 실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것이기에 명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원하는 것이 생기면 "(막연히) 이것만 있으면 좋을 텐데”, “이것만 한다면 내가 어떤 모습일 텐데” 등의 상상을 해볼 뿐, 얻게 된 후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물론, 대략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결혼 생활도, 부모로서의 삶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겪었으며, 그와 관련된 정보들 또한 넘쳐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 들은 정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같은 상황 속에서 각자 다른 에피소드를 만들어 나가는 이유는 바로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 다른 ‘나’의 모습을 갖고 있는데, 남들에게 맞는 상황이 나에게도 ‘당연스럽게’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다.
남들이 다 하고 있고 좋아하는 것에 의문을 던지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라는 존재가 평범하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 상황에 적응하려 할 때
나를 바꾸는 방법보다는
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으면 좋겠다.
나를 바꾼다는 것은, 그 상황에 가장 쉽게 적응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적응하는 ‘척’하는 것이기 쉽다. 내 모습을 숨기는 것이다. 사실, 나를 바꾼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유별나다는 시선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기 마련일 테니 말이다. 게다가 과연 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적응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기는 하다. 그만큼 마찰이 많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를 바꾸기보다는 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이득일 수밖에 없다. 쉽게 적응하는 쪽을 택한다면 그만큼 쉽게 새로운 불만 사항이 떠오르고 또 다른 꿈을 좇게 될 테지만, 크고 작은 마찰 끝에 지켜낸 나 그대로의 모습은 지금을 더 의욕적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줄 원동력이 될 것이 분명하다.
마음 한 켠에 접어놓은 꿈을 펼쳐보고 싶은데, 나를 위한 투자를 실행하기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먼저 가족에게 미안한 느낌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직 펼쳐놓지 않은 꿈이 있다면 나를 위해 일단 상자를 열어봐야 하는 것이 맞다. 아이를 돌보기에도 혹은 집안일을 꾸려가기에도 바쁜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를 개조하여 조용히 묻어가기에는, 하루하루 나와 맞지 않는 상황이 괴로울 뿐이다. 괴로운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남는 것은 '너 때문에'라는 가족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다. 아이 엄마인데도 자기애가 너무 큰 것 아니냐, 엄마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서 지내는 것이 힘들지언정 조금씩이라도 내 꿈 상자를 열어보자. 결국에는 내 본연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테고, 내 꿈 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환경에도 더 활력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 라는 말 한마디에 괜히 나를 숨기려 하지 말자.
좀 유별나다는 평을 들으면 어떤가.
꿈이 있는 사람이기에 들을 수 있는 얘기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