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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Sep 18. 2016

지금 이 시간, 여기에 있습니까

선물을 받았다. 혼자 커피숍에 앉아 우아하게 커피 한 잔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엄마가 된 이후, 노트북 하나 챙겨 들고 커피숍으로 향하는 일은 의미 있고 특별한 시간이다. 점심식사 후 밖에서 당당하게 마셨던 커피의 맛은, 집에서 따뜻한 물에 타서 마시는 아메리카노와 확실히 다르다. 같은 브랜드의 커피임에도 불구하고, 장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는 커피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장소의 분위기도 함께 마시는 것 같다. 같은 커피숍이라도 초록색 간판이냐 보라색 간판이냐에 따라서도 맛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여하튼, 방해 없이 분위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흥분되고 설렌다. 널찍한 커피숍의 자리들을 한 번 스캔한 후, 햇살이 가장 잘 들고 음악도 적당한 크기로 들리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오랫동안 앉아있을 작정인 만큼, 노트북 콘센트를 꽂을 수 있는 자리임은 물론이다.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의 아메리카노와 파니니가 나왔다. 노트북을 켰다. 와이파이도 연결했다. 마우스와 핸드폰도 자리 세팅이 끝났다. 이제 평소 하고 싶던 온라인 쇼핑도 해보고, 궁금했던 자료도 찾아보고, 글도 써야겠다.


그런데 오늘의 to do list들이 떠오른다. 추석 연휴 준비, 우리 가족 스케줄, 다음 주 미팅 자료 준비, 이번 달에 읽기로 한 책, 은행 업무, 아이의 반찬거리 등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런 생각들을 잠시 하고 나니 벌써 30분이 지나갔다.


쉬러 왔는데, 난 쉬고 있지 않았다. 그리워했던 분위기를 즐기러 나왔지만, 내 마음은 이 곳에 없었다.


난 이렇게 간단한 여유를 즐기지도 못할 만큼 바쁜 사람일까?




바쁘다. 다들 너무 바쁘다.


직장인도, 학생도, 주부도 다들 멀티 플레이어가 기본자세라고 생각한다. 멀티 플레이어가 미덕이 되었다. 그리고 바쁜 삶이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소위, 잘 나가고 있는 느낌이랄까. 일을 하면서 취미 생활도 '잘' 해야 하고, 취미로 두 번째 직업을 갖는 사람들도 자주 보이고, 일도 하면서 집안일도 잘 해야 '슈퍼맘'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준다. 원래 해야 하는 일을 잘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 한 것 '뿐'이다. 혼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주변에서 계속 시험해보는 것 마냥, 임무들이 자꾸 주어진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IT 기기들이 야속할 따름이다. 모두가 멀티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환경에 들어와 있으니, 그렇게 하지 못하면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뒤쳐진 사람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할 일이 많을수록 집중이 어렵다. 마음과 몸이 항상 서로 다른 곳에 있다. 멀티 플레이어의 장점은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내 머리를 조각조각 구분 지어 생각을 해야 한다. 이곳에 있는 동안에도, 다른곳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생각해야하고 미래의 일을 미리 준비해야한다. 당연히 지금 이 순간에 집중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머릿속의 그 많은 일들, 다 처리하지도 못한다. 사회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이런 말도 들었다. 어차피 주어진 그 많은 일들 다 제대로 '잘' 하지는 못한다, 가장 비중 있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에 주력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말처럼 쉬운가. 그 주력해야 하는 업무를 하는 중에도 '하찮은' 일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어차피 하기는 해야 하는 일이기에 계속 찜찜하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A라는 일을 하면서 B라는 일을 걱정하고, 반대로 B 업무를 하는 중에는 A가 신경 쓰이는 우스운 일이 발생한다.




지금 이 순간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동시에 해치우고자, 70% 정도만 만족해도 '그래, 이 정도면 해낸 거다'라며 list에서 급하게 지워버리고, 재빨리 다른 업무를 고민하는 행동은 그만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나 바쁜데, 이 정도 한 것도 잘 한 것 아니냐는 핑계거리가 될 수 있음도 경계하고 싶다.


멀티 플레이어를 부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다. 비교하지 않기로 한다. 나를 위해 삶의 to do list를 단순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단순화된 업무 몇 가지를 다 잘하고자 한다. 나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잘게 쪼개가며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고자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충실해지기를, 그리고 짧은 시간이라도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 이 시간, 온전히 여기에만 '자신 있게' 몰두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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