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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Sep 21. 2016

천천히 가더라도, 계속 걷기

따뜻한 차가 좋다. 손이라도 데일까 잠시 망설이면서도,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안을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은 뜨거움. 그런 따뜻함이 좋다. 게다가 그 온도를 오래도록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가끔은 hot / ice 이렇게만 구분되는 온도가 아니라, 같은 hot이라 하더라도 원하는 온도의 차를 주문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커피나 차를 주문할 때면, 내가 좋아하는 따뜻함을 만나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원하는 온도의 즐거움을 누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나는 몇 모금 마시지 못했는데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대방의 잔을 보며, 하는 수 없이 남은 차를 버리거나 take out 잔으로 들고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take out으로 들고나온 잔은 오래도록 내 손에 들려있다. 은근한 따뜻함이 오래도록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잔의 차는 오래도록 마시는 것을 즐기지만, 반대로 일상 생활은 hot하다. 굉장히 뜨겁다. 그리고 빨리 식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이것저것 관심도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지만, 얕은 지식만 방대할 뿐이다. 살짝 발을 담갔다가 금방 싫증을 느끼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가끔은 나의 ‘지나간’ 취미에 대해 누가 물어보기라도 할까 두렵다. 자신 있게 뽐내거나 대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어릴 시절부터 꽤나 오랜 시간 접했던 피아노는 지금도 나름 자신 있는 분야다. 한데, 6년 전쯤에는 건반 악기만 배웠다는 사실이 그렇게 아쉬웠다. 그래서 친한 언니에게 소개를 받아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연습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악기’라는 매력이 너무나도 컸다. 레슨을 해주셨던 선생님이 잘 봐주셔서, 배우기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후 선생님이 운영하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공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평일에는 일에 치여도, 주말에 바이올린 가방을 메고 연습을 가는 스스로가 대견하고 즐거웠고 감사했다. 다만, 그 당시의 내 마음가짐은 '내가 해보고 싶었던 한 가지를 해봤다' 이 정도 수준이었던 것 같다. 공연이 끝난 이후, 난 한 번도 레슨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연주했던 바이올린은 아이의 장난감이 되어 줄도 하나 끊어졌다. 주변에서 가끔 바이올린에 대해 물어보면, 말 그대로 쥐구멍에라도 숨어 들어가고 싶다.




너무 뜨거웠고, 너무 빨리 식어버렸다.


취미였기에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취미가 아닌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그때는 가슴이 쓰리다.


작년 말, 첫 사업을 시작했었다. 사업이라는 표현이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작은 스타트업이라고 하면 될까. 오픈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회사라는 테두리 안에서 일하는 직원과 더이상 나를 돋보이게 해주는 회사가 없는 상태에서 일하는 사람의 차이를 제대로 경험했다. 상처를 받기도, 감동을 받기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다. 자식 같은 첫 사업이었으나, 오픈 후 3개월 만에 휴업 신청을 했다. 아이의 어린이집도 대기 중인 상태에서, 외출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무리하게 hot했던 탓이라고 생각되자, 금세 식어버렸다. 


홈페이지와 SNS는 계속 살려놓은 상황이었기에, 휴업 신청 이후에도 가끔 문의 전화가 왔다. 그럴 때마다, 현재는 휴업 중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곤 했다. 헌데, 폐업을 결정한 후 예상치 못했던 한 업체에서 문의 전화가 왔다. 전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은 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렵더라도, 그래서 느리게 진행되었더라도 지금까지 끌고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지나간 일이고 기차는 떠났다.




내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목표가 생기자, 같은 꿈을 꾸고 있는 혹은 이미 그 꿈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여럿 생겼다. 예전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인들 중 이미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어린아이 둘의 엄마이면서도, 직원도 채용하고 관련 업체들과 협업도 하고, 투자도 받기 위해 시간을 쪼개가며 뛰고 있는 친구가 있다. 몇 년째 눈에 띄는 결과물이 없다며 고민이지만, 지금의 이 시간이 친구에게는 훗날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부러우면서도 존경하는 한 언니는, 잘 나가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전공과는 무관한 사업을 몇 년째 진행 중이다. 언니는 어려운 점을 많이 얘기하지만, 옆에서 볼 때는 굵직한 포트폴리오를 여럿 쌓아가고 있다. 결국 잘 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주변에 스타트업에 몸 담고 있는 선배들이나 지인들을 보아도, 나처럼 몇 개월 만에 그만둔 사람은 없다.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버텨가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천천히 가더라도 계속 걷기는 정말 어렵다. 이렇게 계속 간다고 원하는 목표를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이렇게 계속 간다고 기회를 얻는 일 또한 꿈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 걷다 지치는 것보다 더 큰 상처는 과거에 멈춘 것에 대한 후회다. 



따뜻한 차가 좋다. 그래서 일도 따뜻하게 해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천천히 가더라도 따뜻한 온기가 유지되는 만큼 가능한 길게, 계속 걷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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