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 Ji Youn Mar 10. 2017

내 마음의 냉장고를 부탁해

식탐이 많은 편이다.


인터넷으로 다양한 레시피를 찾아보기도 하고, 가끔은 요리책을 사기도 한다. 요리책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겨볼 때마다, 복잡 복잡해지는 곳이 바로 냉장고다. 어느 정도 자리가 찬 냉장고는 보기에도 좋다. 냉장고 문을 열기만 해도 마음이 뿌듯하다.


하지만 식탐이 큰 반면, 요리는 자신이 없다. 결혼 초반에는 맛있다고 곧잘 말해주던 남편은, 요새는 내가 부엌에 오래 있기만 해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가 만든 요리를 억지로 먹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먹방이 아닌 쿡방이 대세인 요즘 같은 시대에는, 어느 채널을 틀어도 근사한 요리를 선보이는 프로그램들뿐이다. 한데,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것조차 어려운 나의 손재주가 너무 서글프다. 때문에, 만들어보았다가 차마 더 이상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 보관해놓는 음식들이 꽤 된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가면, 오래된 탓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기도 한다. 버려지는 것들이 어디 실패한 음식뿐일까. 의욕이 사라진 탓에, 어느 음식의 구성원이 될지 갈 길을 잃어버린 재료들도 마찬가지다. 냉장고가 꽉 차있기는 하지만, 입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느낌이면 이제는 마음의 짐이 된다. 날을 잡아 냉장고를 청소해야 할 텐데, 시기를 정하기도 어렵다.


사실, 냉장고를 관리하기란 쉽지 않다. 감히, 집안일 중 가장 어려운 분야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집에 있는 가전제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꾸역꾸역 들어갈 수 있는 것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냉동실이 있다 보니, 마치 창고처럼 한 번 들여놓고 잊어버리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렇게 거대한 창고를 다 뒤지고, 버리고, 닦는 일은 자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선, 체력이 필요하다.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반찬통이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던 경우도 많고, 의자 위에 올라와야 보이는 높이에도 꽤나 많은 잡동사니들이 들어와 있다. 꼭 먹을 것만 냉장고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언제 사두었는지도 모르는 얼굴 팩도 있고,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약도 있다. 냉장고 속의 음식물 쓰레기들과 기타 잡다한 쓰레기들을 분류하여 밖으로 들고 나가다 보면, 매주 한 번씩 버리는 분리수거 쓰레기 못지 않게 무겁다. 


시간도 필요하다. 물건을 꺼내는 것뿐만 아니라, 냉장고 한 칸 한 칸 닦기도 해야 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보관되어있던 재료들을 한 데 모으는 것도 시간이 걸린다. 이왕 정리하는 것인데 반찬통을 예쁘게 통일하여 진열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면, 찬장의 접시들도 뒤져야 한다. 파생되는 일들이 이렇듯 소소하게 생기다 보니, 몇십뿐 짬이 났다고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감정도 필요하다. 냉장고 청소에 무슨 감정까지 필요하냐 싶겠지만, 이유는 냉장고를 이용하는 생활 패턴 탓이다. 


냉장고는 마치 화석 같다. 꾸역꾸역 넣으면서 차곡차곡 쌓인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뒤로 밀리고, 자꾸 꺼낼 음식들만 앞자리를 차지한다. 사실, 뒤로 밀린 음식들은 그렇게 잊히기 쉽다. 이러다가 결국 안 먹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뒤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가장 앞자리 음식들만 들락날락 거리며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된다. 이렇다 보니, 냉장고 청소를 위해 최근 음식부터 언제 적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깊숙한 음식까지 하나씩 꺼내고 나면 감정이 복잡해진다. 잘 숙성된 김치처럼 푹 묵혀진 음식들에게 미안하다. 마음만 먹으면 손길 한 번 더 줄 수 있는 음식들이었고, 그렇다면 맛이 없더라도 어떠한 방법을 쓰던 먹을 수 있었겠고, 그렇다면 이렇게 버리는 일도 없었을 텐데. 한 곳에 모아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발길은 마치 죄인이 된 것 마냥 어둡다. 요리를 못 한다는, 살림을 못 한다는 행동의 결과는 본의 아니게 이렇게 비효율적인 낭비로 다가온다.


내 마음도 냉장고 마냥 엄청 크다. 


이런저런 기억들이 저장되고, 잊혀진다. 언젠가 깊숙한 곳까지 흔들어대면 다시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은 기억들은 그저 존재의 의미만 있을 뿐 좀처럼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당장의 감정만 앞부분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지금 이 순간의 일상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이미 바쁘다. 


그러다 아주 가끔 마음을 휘젓는 일을 만나게 되면, 즐겁기보다는 힘들다. 마치 오랜만에 냉장고를 청소하듯 말이다. 냉장고 청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체력과 시간, 감정 관리 모두 냉장고의 그것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물건을 들거나 옮기는 것도 아니면서, 힘이 빠지고 지친다. 며칠을 앓기도 한다. 치유되기까지 몇 주가 걸리기도 한다. 책을 읽고, 수다를 떨고, 혹은 술을 마셔도 해결이 쉽지 않다. 이렇게 속상하고 힘들어야 하는 상황 때문에 더 속상하다.


냉장고의 주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마냥, 다른 사람의 냉장고 속 재료로 단 몇 분 만에 멋진 요리를 만들어내는 셰프들이 있듯이, 내 마음의 냉장고를 잘 다룰 줄아는 전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숨어있던 감정을 찾아내고, 잘 다듬어 더 활기찬 생활이 가능하도록 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런 전문가가 필요 없을 만큼 내 감정 요리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일 테다. 그래서 그 첫 번째 스텝으로, 이제는 마음의 냉장고를 자주 청소하기로 한다. 냉장고를 자주 청소하면 화석이 생길 이유가 없는 것처럼, 내 마음의 냉장고 역시 자주 뒤집어 보며 묵혀 둔 감정을 없애보고자 한다.


그렇게 내 마음의 냉장고가 늘 최상의 컨디션으로 유지되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탁기에서 하늘을 꺼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