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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하며 시작된 서울에서의 국민학교 생활

상처의 시작 (진짜 82년생 김지영의 특별한 이야기)

by 김지영 Jiyoung Kim

1987년 우리가족은 독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다.

엄마아빠는 결혼할 때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아빠는 심지어 신용카드 빚이 있었다고 한다.) 독일 주재원으로 일하는 동안 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거의 2배로 받는 월급을 모아서 한국에 돌아올때는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 아파트에 입주하며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귀국할 당시 1987년에는 서울 이곳저곳에 아파트 단지들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였다. 우리는 당시 아빠의 회사(가리봉동)에 가까웠던 구로구 (현 금천구) 시흥동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입주하게 되었다.


아빠는 수출부서에서 일하면서 귀국이후에도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고 90년대에는 일하는 다수의 직장인들이 그러하였듯이 평일에 주로 야근을 하거나 저녁 회식약속으로 집에 늦게 들어왔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부모님이 자주 싸우게 되었다.

독일에서의 평화롭고 고요하던 삶은 한국에 오면서 엄마아빠의 잦은 언쟁에 방에서 마음을 졸이는 날들이 점차 많아지는 불안한 삶으로 바뀌었고, 엄마는 점점 화내고 인상을 자주 쓰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때는 한국생활의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엄마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내면에 있던 과거의 불행한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귀국후 친정 가족들을 다시 대면하면서 내면으로부터 올라와 엄마를 우울하게 만들고, 이것이 일상생활의 많은부분을 불만족스럽게 한 것 같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에는 대부분 우리같은 젊은 중산층 가정들이 살고 있었고,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산아정책의 영향을 받은 80년대 생인 우리세대는 주로 형제가 두 명 아니면 외동이었다.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이 집에 커피마시러 놀러오면 찬장에서 독일에서 사온 그릇과 커피잔세트 등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해외 생활을 마치 훈장처럼 여기는 모습이었다.

당시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아 해외생활 경험이 자랑거리인 시절이었다.


결핍이 많은 가정에서 자랐던 엄마는 (그 때 당시의 많은 부모들이 그렇햇듯이) 자기가 성취하지 못했던 것을 나에게 기대하며 대리만족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나의 태도와 성적이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때 매질로 나를 성장시키려 하였고,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매년 학년이 올라갈수록 엄마의 기대와 실망도 커지면서 엄마는 나에게 존재는 두려운 존재가 되어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어느날 성적표가 나왔고, 그 성적표를 엄마에게 보여주었을때 화가날 엄마를 마주할 두려움이 너무 커서 받은 성적표를 학교 책상서랍 끝에 꾸겨넣고 집으로 갔다. 그 날 성적표가 나온것을 다른 학부모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던 엄마는 나를 학교로 돌려보내 성적표를 가져오게 했고, 그 날은 유난히 더 혼났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훈계들로 인해 나의 자신감은 나날이 떨어졌고, 동생에게는 엄하지 않은 엄마가 나를 편애한다고 생각되며 엄마의 훈계와 매가 나의 내면에는 상처로 쌓이기 시작하였다.


tempImage2fA3C1.heic 31세가 되어 그 때 당시 살던 아파트 단지를 다시 방문했을때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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