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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호 Feb 26. 2017

[역사정보] 중국사 최악의 비극, 문화대혁명 다시보기

연구동향 - 1

근래 중국근현대사를 전공하기 위해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대부분의 석박사 후보생들이 중화인민공화국사를 연구주제로 선택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확실히 중국의 굴기로 인해 중국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그 부상을 이끈 중국 공산당이 세운 국가의 역사가 ‘핫’해 지는 점이 있는 듯하다. 비교적 최근 중국의 상황을 좀 더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분야가 중화인민공화국사 이니. 개인적으로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를 전후 한 근대의 유입과 대륙의 근대 수용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중화인민공화국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역사학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분야가 어디 있을까. 개인적 관점의 문제지. 


어쨌든 이 중화인민공화국사와 관련하여 최근 가장 ‘핫’한 연구자가 바로 Frank Dikötter 교수다. 그는 2010년 이후 2-3년 간격으로 ‘마오 3부작’ 시리즈를 폭풍 저술하여 학계와 대중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차례로 ‘Mao’s Great Famine’ - ‘The Tragedy of Liberation’ - ‘The Cultural Revolution : A People's History 1962-1976’ 이다. 사실 역사적 시대 순으로 하면 ‘The Tragedy of Liberation’ - ‘Mao’s Great Famine’ - ‘The Cultural Revolution : A People's History 1962-1976’ 순이고.

마오 3부작, 인자한 모습과는 달리 그의 업보가 크다.

 몇 년 전 그의 강연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를 핫한 중화인민공화국사 연구자로 이름을 알리게 해 준 "Mao's Great Famine" 에 대한 내용 이었다. 중국 내부 학계에서는 쉬쉬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대약진운동, 집체 운동을 통해 자본주의를 제대로 겪어보지도 못했던 중국 사회를 공산주의 국가로 멱살잡아 끄집어 올리려 했던 지도자, 마오쩌뚱으로 인해 대략 4천 8백만의 인구(혹은 그 이상)가 아사했다고 하는 끔찍한 사실을 대륙의 당안관(기록관)에서 구한 일차사료를 토대로 제대로 밝혀낸 연구였다. 그의 연구가 주목을 끈 이유는 그동안은 몇 명이 죽었다더라, 무슨 일이 있었다더라 하는 식으로 소문만 무성했던 ‘대약진 운동’이라는 비극적 사건의 상세한 모습을 중국 대륙에서 구한 자료들을 토대로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 버렸다는 것이다.


이후 출간한 ‘The Tragedy of Liberation’ 역시 중국을 '해방' 시켰다고 하는 중국식 공산주의의 허구 및 터무니없음을 꼬집으며 국공내전 승리 직후, 대약진 운동 이전까지 공산당이 벌인 다양한 ‘해방’활동들을 비판적으로 다룬 연구다. 이 일련의 연구가 대부분 중국 대륙에서 구한 자료들을 토대로 다루었기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도 크게 뭐라고 반박하기도 거시기한 상황이 되었다. 사실 나와 같은 초보 연구자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그리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면 그의 연구 이후, 중국 내부에서 외국인 연구자가 일차사료를 구하는 것에 통제가 제대로 심해졌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으로 현지 조사차 상해에 도착하여 남경으로 향하려던 나에게는 청천벽력. 

프랑크 디쾨터 교수. 네덜란드 출신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현대 홍콩대학 교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

그런 이유로 많은 학자들이 그가 저술할 세 번째 연구,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도 꽤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출간된 그의 저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서구 언론에서는 서평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인터뷰를 여기저기서 진행하기에 이른다. 사실 개인적으로 부제를 왜 ‘A People's History’ 라고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사의 뇌관 중 하나이자, 여전히 중국내부에서 신격화되고 있는 마오쩌둥 최악의 통치행위 중의 하나라는 문화대혁명을 대중의 시선으로 연구하려 하였다.그 일환 중의 하나가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한 재평가 문제다.

홍위병

기존의 연구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접근방법은 4인방으로 대표되는 권력층에 의한 암투, 홍위병 동원 등의 사상 투쟁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그의 연구는 실제 대중들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인터뷰에 따르면, 1979년 3중 전회 이후 등소평에 의해 개혁개방 정책이 채택되고, 중국의 경제가 자유 시장 경제로 전환하였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지만, 사실 문화대혁명 중, 후반이 되면 이미 일반 마을단위, 소규모 도시 단위에서는 중앙정부 몰래 – 좀 더 정확히는 중앙정부의 지방정부에 대한 장악력이 확실히 약화된 상황에서 -  시장경제 체제를 자연스레 적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대약진 운동과 집체운동을 통해 형성된 집단 경제 체제로 인한 빈곤을 견디다 못한 지역사회의 지방 정부와 대중들이 합심하여 생산량을 늘려 비슷한 상황의 주변 지역 단위와 물품 거래를 하면서 자연스레 시장을 형성하였고, 그 시장이 점차 확대되어 대규모 시장으로 성장하고 있던 상황에서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었다고 한다. 

등소평, 유명한 흑묘백묘론. 

즉, 등소평이 정권을 잡은 시점에서 이미 자유 시장 경제 체제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 특히 일반 대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흐름이 되어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산당 정부에서는 이 큰 흐름의 물줄기를 틔워준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 물론 그것만 해도 큰 정치적 공헌이지만. 결국 위로는 권력다툼과 사상 투쟁에 여념이 없는 사이 수면아래 수많은 일반 대중들은 생존을 위해 그들끼리 시장을 형성하고, 자유 시장 경제 체제를 초보적 이나마 성립함으로서 다가올 마오 이후 시대를 개혁개방의 시기로 그들 '스스로' 전환시킨 셈이 되었다. 21세기 세계 빈곤률의 1/3을 감소시켰다고 평가받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자유 시장 경제 체제의 도입은 이러한 맥락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 단순히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비극에 방점을 찍어 ‘단절’로 보는 것이 아닌 이전 시기와 이후 시기를 연결하는 연속성 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사, 더 나아가 중국근현대사의 큰 흐름이 이어져 가는 맥락(context)으로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역사학자의 진정한 역할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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