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지옥은 인간이 만든다.
돈바스, 나라와 나라는 전쟁을 하지만 각 나라에 속한 세르게이와 파슈카 두 사람은 죽마고우다. 전쟁을 하도 오래 하다 보니 전쟁은 전쟁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그냥 살아간다. 문제의 땅은 그렇게 세월을 버텨왔다. 또 그렇게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자의로든 혹은 강제로) 황량한 지역에서 두 사람은 고립되어 살고 있다. 러시아 사람인 세르게이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우리 주변에서도 어쩌다 볼 수 있지만 잘살아 보기 위해 양봉을 시작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피해 산이든 들이든 어디든 찾아 들어가 터전을 잡기도 한다. 아마도 세르게이는 이혼 이후 삶을 만회하기 위해 사람이 많지 않은 우크라이나 더 깊숙이 들어와 양봉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돈바스의 풍경은 종말을 향해가는 땅의 모습을 살벌하게 보여줬던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2012)을 연상시킨다. 날씨가 변하고 우물이 마르는 재앙으로 다가온 종말을 <토리노의 말>이 보여줬다면 물도 있고 사람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비옥한 땅이 그냥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종말의 풍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염없이 전쟁이 상주하니 어느 한쪽 편이 분명하면 어떻게든 다른 상대에 의해 총을 맞는다. 스나이퍼에게 저격당한 군인을 묻어주기도 하고, 주인이 없는 집을 털고다니는 우크라이나인인 친구 파슈카에게 부아를 내기도 하는 세르게이는 사람이 지켜야 할 마지막 그 무언가를 간절히 붙잡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편치 않는 평화, 시끄럽고 살벌한 고요 속에 살아가던 어느 날, 그의 집에 러시아 군인이 찾아온다. 전쟁 속에서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땅에서 생업을 하는 세르게이에게 자국 군인은 오히려 반갑지 않은 존재다. 조용히 회색을 유지하며 벌을 치는 것으로 그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군인을 묻어주고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알게 된 순간 그는 잘 유지하던 회색 벌들의 색을 밝게 눈에 뜨이는 본래의 색깔로 돌려놓는다.
이혼한 전처와 가족이 그립고 가까스로 충전된 휴대전화로 연락을 취해보지만,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더 이상 위험한 돈바스에서 떠나자고 그를 찾아오던 군인이 그를 설득하지만, 그는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으로 그 집에 남는다. 어쩌면 빈집을 털고 다니며 즉각적인 즐거움에 단박에 반응할 수 있는 파슈카의 행동들이 세르게이의 삶의 지향점일 수도 있다. 그는 잘 살기 위해 돈바스 깊숙이 들어왔지만, 자신과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회색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끝까지 버텨왔다. 그리고 그는 그 추운 곳에서도 벌을 잘 유지하고 잘 치는 능력자다. 하지만 러시아 군인을 죽였던 스나이퍼의 은신처를 러시아군에게 알려준 순간 그의 회색 벌들은 그 지역 돈바스에서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는 노란 꿀벌로 바뀐다. 한쪽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는 상황은 결국 그를 절망으로 이끈다. 떠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이 배신자를 처단하러 올 상황이 벌어지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그냥 잘 살아갈 삶을 원했고, 사람은 어디서든 갈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기본 존엄이 사라지고 그 황량한 땅에는 종말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 세르게이도 파슈카도 결국 어떻게든 떠나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한다. 위정자들은 늘 수십 년의 전쟁을 이끌어 오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에 놓인다.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원이 풍부한 돈바스는 이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섞여서 살아간 오랜 세월이 있었다. 지하자원이 풍부했던 지역인 만큼 우크라이나 경제를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지만 30% 정도를 차지하던 러시아의 노동자가 탄광 등의 노동에 대다수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작도 원활했던 것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군침이 도는 땅일 수밖에 없는 지역이다. 영화에서처럼 깊숙이 들어간 돈바스 지역은 모두가 떠나버린 황량함으로 남아있다. 사람이 떠나면 그 어디든 종말의 풍경이 된다. <회색 벌들>은 정치 놀음으로 의해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변해가는 비옥한 땅의 풍경을 삭막한 화면으로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