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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Sep 12. 2018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루카 구아다니노

사랑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이란?

    엘리오와 올리버의 짧지만 강렬한 사랑이 펼쳐지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두 사람의 사랑의 상징과 같은 그리스 조각상들의 사진들을 전시하는 오프닝으로 시작해 한여름의 강렬하고도 풍부한 햇빛, 이탈리아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 등등이 영화 곳곳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그런데 원작(안드레 애치먼, <여름 손님>)과는 다르게 이 영화는 1983년이라는 시기가 선명히 명시되어 시작한다. 80년대 초반, 뜨거운 열정으로만 소년과 청년의 사랑을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냉혹했던 시절이었을 거 같은데 아마 아는 사람들은 그 시절에 저런 이야기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마이클 스털버그와 아미라 카사르가 분한 엘리오의 부모 펄먼 부부는 그 의문을 더욱 짙어지게 한다. 왜냐하면 엘리오와 올리버의 만남과 사랑의 과정 속에 이 부부의 섬세한 보살핌이 존재했었고 특히 그들을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만들어 주는데 엘리오의 아버지인 펄먼 교수의 행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흥미로운 교수님은 그리스 청동상 슬라이드를 함께 정리하면서 올리버에게 사랑에 대한 암시를 던지고 호스트로서 손님인 게이 부부를 맞이하는 다름에 대한 에티튜드를 엘리오에게 엄격하게 가르친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던 80년대 초반에 시대를 너무나 앞서 나간 펄먼 부부의 모습은 이 영화의 두드러지는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언급은 왠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아마도 그 이유는 추측하건대 이러한 모습이 인간으로서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이라 판단해 쉽게 폄하해 버리고 그 의미를 충분히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어떤 평론가는 이 부모가 너무나 이상적이라 성기가 없는 사람들 같다고 했다. 왠지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언급이다.) 인간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욕망은 지극히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이상을 향하는 인간의 마음 역시도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부부의 판단은 이상적인 인간을 향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이러한 이상에 가까운 부모의 태도를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아직도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이고 의도적인 배제가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의심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비단 나만의 것인지는 조금은 궁금해진다. 


    서툴고 어리지만 적극적인 엘리오에 비해 올리버는 엘리오에게 다가가는 것을 두 가지 이유에서 망설인다.(걱정한다.) 첫 번째 이유는 이러한 사랑(결국 사랑을 시작하는 자신)으로 인해 아직 어린 엘리오를 망쳐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두 번째는 역시 80년대를 사는 젊은 학도로서 동성애에 대해 가지는 막연한 반감 혹은 두려움 때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펄먼 교수의 태도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을 남기고 떠난 올리버와의 이별을 엘리오가 현명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 역시 펄먼 교수다. 그는 엘리오의 엄마에게도 고백하지 못했던 비밀을 엘리오와 공유하며 그 사랑과 이별을 충분히 겪어낼 수 있도록 조언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약 그 시절에 특별한 어떤 부모가 (지금 현재도 그렇고 한국사회라면 정치적 마타도어를 감추고 종교를 빌미로 더욱더) 동성애를 선동한다거나 조장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건 정말 일반의 상식으로는 다가가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이 앞서 나간 부모도 아주 짧게 보통의 부모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별 후 겨울, 올리버의 결혼 소식을 전화상으로 전해 들은 두 사람은 기쁘게 축하해주고 엘리오에게 전화를 넘긴다. 엘리오가 다시 전화를 받은 후 수화기를 내려놓은 두 사람의 긴장된 표정은 정말 인상적이다. 역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타오르는 장작불 앞에 앉아 완전히 끝나버린 사랑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엘리오를 향해 부드럽게 들려오는 펄만 부인의 목소리는 (그들 부부의 세심한 보살핌이 있었기에) 상처를 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용기를 던져준다.   


    이들 부부는 왜 이러한 행동을 선택하고 그들의 모든 것을 기다려주었던 것일까? 올리버가 엘리오에게 결혼 소식을 전할 때 엘리오는 부모님이 자신들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말한다. 올리버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며 그런 부모님이 있는 엘리오를 행운아라 말한다. 자신의 아버지면 자신은 아마도 어딘가로 유폐됐을 거라 대답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엘리오의 다양한 재능은 영화 전체에 가득 차있다. 능숙하게 편곡을 해내고 많은 독서량과 역사든 문학이든 거침없이 대답하는 엘리오를 향해 올리버는 너는 도대체 모르는 것이 뭐냐고 묻는다. 아직 어리고 서툴다는 이유로 당신이 나를 알아주기 바란다고 말하는 엘리오. 올리버는 어떠한가? 살구의 어원에 대한 펄만 교수와의 토론에서 그의 학문적인 재능과 유머러스한 태도가 엿보인다. 엘리오가 선뜻 다가가기 힘들어했던 올리버의 충만한 자신감은 역시 그의 재능에서 나온다고도 볼 수 있다.(영화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원작에서는 지금까지 방문한 여름 손님들 중 가장 부지런하고 훌륭하다고 펄먼 교수나 엘리오가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재능이 뛰어난 이 두 젊은이는 어찌 됐건 살면서 서로의 뮤즈도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도 이 부부는 그 여름의 사랑이 그들에게 상처가 아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그들이 더욱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통념이 그들의 재능에 벽이 되지 않도록 이들 부부는 그들을 보호하는 선택을 한 것이며 그 어디에 있든 그 어떤 상황이든 이 부부의 행동은 부모라는 이름의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선하고 현명한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티모시 샬라메와 아미 해머의 완벽에 가까운 케미스트리는 결국 스토리 내부에서 잘 갖춰진 엘리오의 아버지이자 올리버의 멘토인 펄먼 교수 부부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올바름, 아니 선한 인간으로서의 정치적 올바름이 두 사람의 사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낸다. 뜨겁고 푸르른 여름과 함께 어우러지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 속에는 선한 사람에 대한 정치적 선동이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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