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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Aug 16. 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 엄태화

익숙함으로 구성된 새로운 재난 영화

  서울에 전대미문의 지진이 발생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속에 어쩌다 한 아파트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한파마저 재난을 더욱 악화시켰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 속에서 아파트를 소유한 주민들은 사수하기 위한, 아파트가 무너진 사람들은 탈환하기 위한 사투가 벌어진다. 아마도 재난영화라면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스토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영화 초반에 이미 아파트에 들어와 있던 외부인을 살벌한 난전을 통해 모두 몰아내며 시작한다. 재난의 스펙타클한 전개 이후 장르의 클리셰가 아닌 다른 익숙한 것들을 이용한다. 이러한 구성이 이 재난영화를 새로운 스타일로 만들어 냈다.

 아파트를 사수한 그들은 새롭게 시스템을 만들고 구심점을 뽑아 그들만의 기준을 가진 안식처를 만든다. 어디선가 본 듯한 배제와 들어봄 직한 혐오가 그 속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이러한 모습들을 익숙한 서사와 이미지로 표현한다. 남다른 희생정신으로 얼떨결에 입주자 대표가 된 영탁(이병헌)은 아파트 주민이 아닌 이들에게는 도덕적 기준과 인간에 대한 선의가 아예 없는 듯 보인다. 또 다른 인물인 민성(박서준)은 인간성과 생존이라는 갈림길에서 아내 명화(박보영)를 위한다는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 한발 앞서 영탁을 돕는다. 영화의 한 축인 이 두 사람의 서사는 굳이 재난 영화가 아니더라도 다른 형태의 장르나 드라마 혹은 소설 등에서도 있음 직하다. 

 자신들만이 살아남았다는 오만함을 뽐내는 희망적인 영화 초반의 정화 작업은 누구나 알아볼 법한 공익 광고를 연상시킨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포식자의 위치로 자리매김하며 그들만의 잔치가 벌어지고 그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영탁의 광끼 어린 모습은 이 영화의 원작인 웹툰의 페이지를 넘기는 듯하다. 결국 그들만의 유토피아가 파국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는 콘크리트 폐허에서의 전투 장면은 무수한 서부영화에서 보이는 협곡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서부영화에서의 협곡은 승리와 패배 혹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다. 오만과 방심으로 협곡 사이로 들어간 이들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은 협곡 위의 외부인들에게 공격당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다. 이렇게 꼭꼭 닫힌 아파트의 바리케이드는 결국 무너진다. 이 콘크리트 협곡의 미장센은 더없이 훌륭하다. 

 영화 밖 현실 속에서 아파트는 삶의 공간이 아니라 학군을 나누고 재산을 증식하며 계급을 형성하는 수단으로 변질했다. 그래서 재난을 뚫고 혼자 살아남은 콘크리트 덩어리에서 만들어진 유토피아는 어쩌면 유일하게 리셋되지 못한 과거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폐허 속 옆으로 넘어진 고급 아파트였을 것 같은 그곳에서 버텨낸 생존자의 ‘살아있으니 살아야 한다’는 말은 이 콘크리트 덩어리가 현실에서 존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도덕의 선을 넘어버린 이들의 악다구니와는 반대편에서 다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인간사의 아주 보편타당한 명제를 보여주기 위해 익숙한 서사와 이미지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영화의 방식을 새롭게 구성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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