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인생을 살다.
청각장애를 가진 케이코는 갓 데뷔한 프로 복서이다. 그런데 그녀를 키워낸 거의 80년이 되어가는 아라카와 복싱장이 팬데믹의 영향과 재개발, 회장님의 건강 문제로 문을 닫으려 한다. 케이코가 복싱을 시작한 이유는 단순히 때리는 느낌이 좋아서지만 힘겨운 승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어려운 문제를 안긴다. 솔직하고 정직한 그녀의 인간적인 재능이 프로가 되는 데는 도움이 됐지만 이를 넘어서는 데는 걸림돌이 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저물어 가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조금은 다르나 평범한 한 청년의 이야기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케이코의 감정에 따라 자막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케이코가 동생과 나누는 대화 중 무성영화 형태의 자막이 두 번 등장한다. 이는 케이코가 자신이나 상대에 대해 단호함이 베여 있을 때다. 집세를 받거나 아님 복싱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다. 여기에는 케이코의 단호한 의지가 담겨있다. 하지만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의 수화 장면은 자막 없이 그녀의 엄격한 일상과는 다른 무심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각기 다른 방식은 소통하는 것이 남들보다 더 불편했을 그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그녀의 언어에 담긴 단호함은 차이로 인해 겪었을 부당함에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의지이지만 자막이 없는 그녀의 대화는 세상 속에서 느끼는 그녀의 피로감일지도 모른다. 시합 후 느낀 당혹스러운 타격의 고통에 케이코는 복싱에 대한 전의를 상실한다. 거기다 자신을 키워준 속 깊은 회장님의 복싱장마저 문을 닫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케이코가 다음 경기를 준비하며 고통을 이겨가는 과정은 조금은 느리고 서툴다.
흔들리지 않을 거 같던 우리의 일상은 팬데믹을 전후로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러나 복싱장의 마지막은 꼭 이런 거대한 재난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오래된 마을의 재개발이나 회장님의 건강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변화이다. 체육관을 정리하며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케이코는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회장님과 복싱을 완성해 주는 두 코치는 어려웠던 성장 과정에서 스스로를 무장시킨 케이코의 단단함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세월이 복싱장을 변화시키듯 그 변화 속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변화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언어는 다른 사람과의 일상의 대화처럼 보통의 자막으로 영화의 끝을 향해 간다. 비록 울분의 첫 번째 패배를 경험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의지와 행동이 만들어 가는 긴 인생의 한 과정일 뿐이다. 하나하나 기구를 빼고 정리가 되어가는 복싱장의 마지막과 함께 내레이션으로 등장하는 그녀의 연습 일기는 평생 단호함으로 무장하고 어느 누구보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프로선수 케이코의 모든 것을 보여 준다.
세 번째 시합 후 다시 성실하게 로드워크를 하던 어느 날 케이코는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상대 선수를 우연히 만난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상대방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서 단번에 감정을 읽기는 쉽지 않다. 영화 중간에도 종종 보이는 케이코의 이러한 표정은 그녀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합 중 반칙을 당했다면 누구라도 흥분할 수 있고 그 탓에 패배했다면 그것 역시도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삶에서 무언가가 사라지거나 변한다면 분명 당혹스럽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 또 프로 복서를 병행하는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삶을 살아간다. 엔딩 크레디트 끝에 일상의 소음이 사라지며 들려오던 줄넘기 소리는 어렵게 소개받은 복싱장이 멀어서 다니기 힘들겠다던 케이코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여전히 복싱을 계속할 수 있고 아니면 그만둘 수도 있다. 하지만 멋진 그녀의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