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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Aug 17. 2018

<잔느 딜망>(1976) - 샹탈 아커만

공간과 행동 속에 시간을 담다.

   카메라는 영화 속에서 잔느와 그녀가 존재하는 공간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바라본다. 만약 당신이 어릴 때,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일을 하는 어머니를 오랫동안 바라본 기억이 있는가? 감독은 역사적인 상흔을 가지고 가족의 한가운데 서 있는 어머니의 존재와 그녀의 공간을 아마도 어릴 적에, 조금은 떨어져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본 적이 많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 공간의 모습은 세심한 기다림과 끝없는 허전함이 공존한다. 잔느의 단순한 행동 하나하나와 결합한 공간을 흡사 샹탈 아커만 감독의 다른 영화인 <나 너 그녀 그>에서의 끝없이 건조한 느낌으로, 우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없이 듣던 <안나의 랑데부>의 안나처럼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들여다본 영화의 구성은 매우 단순하다. 잔느가 있고, 그녀의 집(정확히 부엌)이 있고, 삶의 반경 내에 그다지 다양하지 못한 은행, 잡화점, 수선집, 카페 등등 일상의 장소가 있다. 이러한 곳에서 만들어진 잔느의 3일이 201분이란 긴 러닝타임을 가진 이 영화의 전부다. 단순한 공간과 매우 규칙적인 생활 안에 어머니이고, 여인이고, 사람인 잔느의 일생이 있다. 그러므로 감독은 영화적으로 긴 시간마저 부족해야 할 듯한 그녀의 삶이 있어야 했다는 것을 <잔느 딜망>에서 보여 준다.


잔느, 그녀의 시간


  이 영화가 보여주는 특징은 201분이란 일반 영화들보다 긴 시간을 길지 않게 느끼게  하는 시간적 감각인데 이는 조명에 의한 효과이다. 잔느는 강박적으로 방에서 나올 때마다 등을 꺼버리는데, 이것이 장면 전환의 효과를 주며 영화가 수많은 컷으로 구성되 빠른 호흡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영화는 식사를 준비하고, 뜨개질과 청소를 하고, 장을 보는 잔느의 단 3일간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며, 그 일상 속에 각인된 시간의 궤도가 어느 순간 이탈하게 되기까지는 흔히 보는 부엌의 여느 여인들과 유사한 모습을 반복한다. 그리고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뿐 아니라 이렇게 기계적으로 등을 꺼버리는 잔느의 절약 방식은 언젠가 그녀의 내면에서 터져 나올지 모를 불안하고 파괴적인 심리를 보는 듯하다. 이렇듯 단순한 생활의 일과를 쉬지 않는 잔느의 모습에서 도드라진 점이 있다면 그녀가 생계를 위해 ‘매춘’을 한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를 잔느의 이 생계 수단을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감추고 있다. 오히려 잠깐의 휴식조차 허락되지 않을 듯이 규칙적으로 보여주는 단순한 일과들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중반, 잔느의 일상이 궤도를 벗어나는 시점은 바로 등을 끄는 것을 잊어버린 순간이며, 그때부터 잔느는 자신의 행동과 시간에 생긴 균열 속에서 혼란에 빠진다.

의식하지 못하는 시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렇기에 더 불안한 잔느의 가사노동 속에서 내부로부터의 혼란함과 감정적 분출을 서서히 느낄 수 있게 되는 시점은 두 번째 날, 잔느가 방의 등을 잠깐 끄지 않는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의 진행상 처음의 이러한 어긋남은 인지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균열들이 서서히 중첩되면서 어느 순간 일의 순서가 바뀌고 조금씩 시간의 틈이 생기며 균일한 행동 배열 안에서만 돌아가던 흐름이 충돌한다. 흡사 공장의 기계화된 시스템에서 공정이 하나 둘 빠져나가듯 무너진 일과가 시간의 교란을 가져오고 잔느의 행동은 늘 유지하던 일정한 패턴을 잃어버린 채 표류한다. 그 표류의 끝에서 잔느는 이미 정해진 시간에 도착한 선물의 끈을 손으로 풀지 않고 가위로 끊어버리는 다른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가위는 생명이 없는 듯 보이는 잔느의 지금까지의 시간을 멈춰버릴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첫 번째의 마지막까지(아마도 잔느의 남편이 죽거나 혹은 이혼했거나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지고 아들을 혼자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날까지), 영화는 가장 일상적이고 기계 같은 느낌으로 잔느의 가사일과 거기에 얽힌 시간을 반듯한 열차의 배열처럼 보여주는데 이는 영화의 내용상 가장 길지만 가장 빠르게 지나간다. 하지만 결국 끝나지 않을 세 번째 날의 끝에 잔느는 이미 탈선된 시간의 열차를 스스로 멈춰버리고 더 이상 흘러갈 수 없게 만든다. 열차의 배열 혹은 공장의 분업화된 시스템 같던 이전의 잔느의 가사일과 맞물린 시간에는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지만 사소한 실수(혹은 행동)로 인해 그 죽어있던 시간에서 잔느의 의식은 조금씩 되살아나고, 기계와 같던 생활에서 인간의 의식으로 돌아왔기에 이러한 이탈 속에서 만들어진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은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지 목적조차 없는 무(無)의 시간이 된다. 이미 자신도 모르게 각인된 규율이 붕괴하였기에 이제 그다음의 시간이 온다고 해도 그 시간을 의식해야 하는 그녀는 해야 할 일을 모르거나 아니면 더 이상 다음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영화 초반에 돈을 건네고 돌아가는 남자들의 모습으로 유추만 가능했던 잔느의 매춘 행위를 가위로 선물의 포장을 뜯어내고 그것을 방에 그대로 방치한 순간에, 매춘을 하고 있는 잔느의 자각이 시작되고 거울을 통해 그 모습을 직접 보여준다. 그리고 그 행위가 끝난 후 그 의식하는 시간 속에서 잔느는 남자의 목을 가위로 찌르기에 이른다. 


의식이 돌아온 시간


 의식이 돌아온 순간 삶의 방식을 잃어버린 그녀, 이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녀는 끊임없이 일한다. 하지만 그 끝없는 일이 단순한 행동의 반복일 뿐 그녀의 삶은 아니다. 그리고 매춘을 통해 그 끝없이 반복되는 일과를 유지한다. 단순한 행위의 반복, 그래서 그녀는 어디서 균열이 생긴 것인지를 인지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 이전의 모든 것은 잔느라는 한 여인의 의지나 정체성 없이 이루어진 것들이기에 모든 것이 깨져 버린 시간 속에서 그녀의 행동은 어긋난다. 아이를 어르는 방법이 어색하고 커피(혹은 우유)의 맛이 나빠짐을 느끼고 선물을 뜯느라 저녁과 매춘을 준비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이제까지 잔느가 일하던 공간은 명백히 어머니의 공간 혹은 여인의 공간이지만 정작 그녀의 삶을 살 수는 없는 공간이었다. 이는 그녀가 만드는 음식, 그녀가 정리해 놓은 깔끔한 모습들이 바로 그녀 자신이 사라진 그 순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진정한 의식이 깨어난 혼란한 시간 속에서의 그 공간은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두워진 거실에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잔느를 보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살고 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했던 집은 자신이 아닌 역할로서의 여인의 공간이다. 잔느의 무의식적인 행위와 동선 그리고 균열로 만들어 낸 시간의 틈새를 이용해 감독은 독특하고도 분명한 내용과 스타일로 역할로 규정지워진 여성의 깊은 고통을 그려내고 있다.

 생을 살기 위해 매춘을 했던 <비브르 사비>의 나나가 생각난다. 그녀는 타인에 의해 그녀의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녀의 생을 그녀와 영화를 본 관객이 함께 살았다. 이 영화 <잔느 딜망>에서는 과연 그녀가 그녀의 생을 살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우리는 그저 기계적으로 숨쉬다 그 숨쉬는 방법마저 잊어버린 한 여인을 그 긴 시간동안 보았을 뿐이다. 201분 동안 잔느의 의지는 선물의 끈을 가위로 자르고 그 가위로 매춘의 상대를 찌르는 그 순간 뿐이고 카메라는 그녀의 진정한 삶이 없었던 일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억압을 구석구석 뚜렷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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