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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Jun 30. 2018

야마모토 사츠오 & 신도 가네토

일본거장 탄생 100주년 기념 회고전 2012년 2월 7일 ~26일


   오늘(2018/06/30) 영상자료원에서 드디어 야마모토 사츠오의 <하얀거탑>을 봤다. 얼마전에 재방영한 한국 드라마<하얀거탑>은 인간 장준혁의 성공과 그 이면에 방점을 뒀다면 야마모토 사츠오의 영화 <하얀거탑>은  자이젠 고로를 둘러싼 의사란 조직의 견고한 카르텔에 방점을 두고 있다. 교수 임용문제를 두고 각 파벌간의 모래알 같은 암투를 그리고 있지만 그 지저분한 전쟁이 수습된 후 그들의 권위에 위협이 가해지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뭉쳐서 그들의 권위를 지켜낸다. 영화의 초기는 명예욕에 눈먼 인간 군상을 그리는 듯 하지만 그 깊숙한 속내는 그들의 겨고한 카르텔이 만들어 낸 그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너무나 뻔뻔한 위선이 영화 전반을 뒤덮고 있다. 그리고 결국 자이젠 고로를 비롯한 각 개인들의 위선적인 모습만을 비추는 듯 하지만 그 위선들이 결합해 형체를 갖추면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무섭게 재현한다. 힘없는 개인이 어떻게 죽어나가든 그들에게는 의사로서 가져야 할 인간에 가장 기본적인 감정인 연민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런 자이젠 고로가 회진에 나서는 마지막 장면은 계급이 만들어낸 견고한 카르텔, 혹은 권력이 만들어낸 견고한 카르텔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 속에는 인간의 감정이 들어갈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두려운 부분이 바로 그 점이다.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정확하고 리얼하게 그려내는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의 가장 대표작을 접하고 예전에 본 영화들에 대한 생각들과 더불어 사회를 바라보는 이 어마어마한 감독의 힘을 다시한번 느껴본다. 역시 생각이 짧고, 어휘가 짧고, 감정만 넘치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나의 부족함이 원망스럽다. 아래는 2012년에 쓴 어설픈 글들이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야마모토 사츠오라는 감독의 영화를 영상자료원에서 봤다. 늘 감각도 지식도 어휘도 짧은 나의 글에 좌절하지만 그래도 이 야마모토 사츠오의 <상처투성이 산하>를 그나마 가난한 어휘로 표현하자면 영화적 파워가 너무나 엄청나서 폭주하는 기관차를 연상케 한다. 워낙 내용 전개에 힘이 넘치는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 최고봉이라 생각했던 영화는 단연코 2008년 미이케 다카시의 <태양의 상처>라고 믿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이 가열찬 영화도 중간에 잠시 숨을 고르는 씬이 존재했었는데 이 영화 <상처투성이 산하>는 그런 숨고르기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단거리 선수가 자신의 최고 스피드로 마라톤을 결승점까지 끌고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강렬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정말 대단한 영화다.



 영화의 내용을 좀 언급하자면 쉽게 설명해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하다>의 확장판이라고 보면 딱 적확한 비유가 될 거 같다. 현재 일본은 재벌이란 개념이 많이 없어 졌다고 하지만 그 시대 철도 개발권을 놓고 벌어지는 재벌 간의 경쟁 그리고 그 사이에서 농락당하는 사람들과 자연 그리고 잔인한 금융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들 재벌의 행보에 따른 도덕성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매우 신랄하게 표현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러한 내용들이 현재 우리나라의 모기업이 너무나 딱 맞게 겹쳐지는데 비교하자면 우리의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더 저열하고 더 비겁하고 더 통탄할만하다. 이러한 내용들이 153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동안 펼쳐진다



  우리나라에 거의 소개 된 적이 없는 이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파감독 중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속된 말로 아주 쎄게 사회문제와 서민문제 등을 심도 있게 그리면서도 대중적인 흥행을 놓친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영화 이후에 <폭력의 거리>(1950), <금환식>(1975)을 보았는데 4~50년 전의 영화들과 지금 우리 사회 현실에 폭주하는 부정과 비리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맞아떨어지는지 끔찍할 정도다. 특히 <폭력의 거리>는 암거래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삶을 좀 먹는 조폭과 다름없는 폭력적인 경찰 후원회와 그것을 비호하는 경찰, 검찰 그로 인해 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철저히 유린당하는데 이것에 분개해 의연히 일어나 개혁을 일궈내는 한 신문사와 그 기자들을 그리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애기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과 무한히 겹쳐진다. 그리고 <금환식>은 지금 통합했다고 큰소리 치고 있는 당이 지금처럼 가다가 어떻게 될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청사진이다. 굉장히 재미있고 그러나 영화 상영시간 동안 내내 실소가 터지고 불편한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용을 끌고가는 영화적 힘이 너무나도 엄청난 영화들이었다.

   


  2월 주말을 거의 이 영화들에 올인을 해서 많이 피곤하지만 이런 감독이 지금에야 소개된 것이 많이 아쉽다. 현재 이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과 또 다른 한 감독인 신도 가네토 두 사람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고 있는데 야마모토 감독에 비해 신도 가네토 감독은 그나마 많이 알려진 감독이고 나도 이 감독의 가장 유명한 영화 중 하나인 <벌거벗은 섬>(1960)은 꽤 오래전에 봤었다. 이 감독은 필모에 있는 영화 편수가 무지하게 많은데 내가 본 몇 편의 영화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이 감독은 삶의 원시성에 무한히 경도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섬>도 그렇지만 남자들이 전장으로 다 사라져 홀로 남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본능적인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그린 <오니바바>(1964)나 어느 유명한 노년의 여배우에게 찾아온 옛 친구 부부와 자신을 돌봐주던 관리인 할머니와의 몇일 간의 휴가를 그린 <오후의 유언장>(1995)에서도 삶의 원시성이 주는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 이 신도 가네토 감독의 또 다른 유명한 영화인 <원폭의 아이>(1952)는 나의 짧은 지식으로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1959)가 겹쳐졌는데 직접 전쟁과 원폭을 경험한 일본의 감독이 만든 영화라서 그런지 피상적인 <히로시마 내 사랑> 보다도 더 깊은 전후 일본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듯 했다. 어쨌든 워낙에 신도 가네토 감독의 작품이 많아서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의 작품 편수 보다 두배 더 많이 상영하지만 솔직히 신도 가네토 감독보다 이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에게 더 꽂혔다. 기간이 짧아 충분히 상영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일본 문화원에 함 문의라도 해 볼까 싶은 생각도 든다. 전체 영화의 회고전을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



 영화를 보는 내내 2012년의 한국의 현실이 60, 70년대를 거쳐 오는 일본의 사회 전반의 문제를 고발하는 영화들과 내용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지는게 어이가 없고 슬프다. 게다가 영화라는 매체로서의 만듦새도 뛰어난 것이 많이 부럽다. 야마모토 사츠오는 정말 대단한 감독이다. 요즘은 한번 씩 영화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까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얼마 전 보았던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처럼 방대한 원작을 가진 영화가 사건을 어떻게 이미지화 하고 그 속에서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해 나가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경험을 했듯이 <폭력의 거리> <상처투성이 산하> <금환식>을 통해 본 이 야마모토 사쓰오의 전체적인 영화 세계를 통과해 보고 싶다. <금환식> 역시 이미지로 사건과 캐릭터를 구축하는 가장 영화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고 그렇게 전개되는 영화의 힘이란 정말 엄청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저 스토리를 구술하는 매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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