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ron A Nov 19. 2020

<동경이야기>(1953)와 <카페 뤼미에르>(2003)

오즈 야스지로 탄생 백주년을 넘어서 쓰다. (2004)

  오즈 야스지로와 허샤오시엔을 동일성과 차이라는 두 단어로 단순히 비교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것은 너무나 무모한 언어의 선택이 될 것 같다. 두 사람은 살아온 시대가 달랐고 스크린으로 옮겨온 이야기의 형태도 달랐다. 하지만 영화라는 판타지를 통해 보여지는 현실의 모습은 그 괴리만큼 힘겨운 고뇌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같은 것이고, 100년이라는 ‘오즈’의 시간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는 허샤오시엔의 이야기는 여전히 가족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생의 무게가 오롯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차이와 동일성이란 두 단어로 두 사람을 말해야만 한다면 두 영화 <동경이야기>와 <카페 뤼미에르>를 비교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방대한 두 사람의 필모그래피와 아직도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는 살아있는 거장의 발자취를 작은 발걸음으로 따라가긴 벅찬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강박과도 같은 생각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해 보인다. 새롭게 다시 본 <동경이야기>의 노 부부는 여전히 자식들을 이해하려고 무던히도 애쓴다. 보고 있는 관객이 회가 날 지경에 이를 만큼 자식들의 이기가 넘쳐나도, 그것을 이해 한다는 듯 미소가 담긴 대화로 어른임을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 고마움으로 자리잡았던 정성을 다한 노리코에게 아버지는 어머니의 유품인 회중시계를 건내 준다. 노리코는 이미 8년 이라는 긴 시간 전에 세상을 등진 아들을 생각하며 홀로 살아가고 있고, 며느리를 걱정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그 유품은 거의 한 세기의 세월을 넘어온 <카페 뤼미에르> 속의 요코가 하지메의 생일 선물로 건넨다. 두 영화를 볼 때 요코에 비교 될 만한 인물이 누굴까 생각해 보면 이 노리코란 인물이 겹쳐진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가는 길에 유품인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여전히 자신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노리코에 비해 요코는 그 사이를 흐르는 긴 세월 만큼 많은 변화를 품은 인물이다. 아마도 오즈는 노리코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조신한 기다림을 은근히 기대한 것은 아닐까싶다. 하지만 허샤오시엔이 바라보는 요코의 모습은 다르다. 그는 요코를 세상을 받아들이고 당차게 살아갈 여인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오즈의 젊은 이들에 대한 관점과 현재의 허샤오시엔의 그것의 큰 차이라 생각된다. <밀레니엄 맘보>나 올해 부산 영화제에서의 <쓰리 타임즈>의 ‘연애몽’과 ‘청춘몽’의 서기의 모습이 보여주는 것과 유사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차이는 단편적으로 말하기 너무나 무모한 것이지만 세월이 보여주는 가장 궁극적인 모습은 결국 ‘변화’이고 그렇다면 이 세월이라는 것이 그 어떤 다른 어떤 명제보다도 두 거장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시대를 대표할 영화의 거장들인 그들이 바라보는 가족 속의 부모란 존재는 세기가 변한 시간을 거슬러 왔음에도 여전히 자식들을 바라만 보고 있음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미혼모가 되겠다는 엄청난 이야기를 덤덤히 풀어놓는 요코에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뒷 모습과 바라지도 않았던 온천의 여관에서 한숨도 자지못한 노 부부의 방파제에서의 뒷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생각이 같을 수 없는 부모와 자식은 그냥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그건 아직 부모가 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평생 가정을 만들지 않았던 오즈가 그린 부모의 모습이 허샤오시엔의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아버지의 모습과 유사할 수 있는지는 조금 놀랍다. 스스로의 생각만큼 보여지지 않는 자식과 부모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고 한 세기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두 영화가 비슷하다. 하지만 허샤오시엔은 바라보게만 되는 자식들의 삶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간다. 가족이라는 구성을 새롭게 시작하게 될 요코의 일상은 여전히 흘러가는 세월 속의 시간이지만 부모가 더 깊이 보지 못한 요코의 마음 속에서 새롭게 자라나고 있을 무언가를 허우샤오시엔은 그리려 하고 있다. 또 다른 생명이 커가고 있는 것처럼 요코의 일상도 ‘오즈’가 남겨놓은 영화 속 많은 삶의 이야기처럼 가족내의 사람들과 눈의 높이, 감정의 높이가 맞추어져 있을지 모른다. 그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녀를 마음에 둔 사람이 있고, 그녀가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삶은 이어지고.

  오즈 야스지로와 허샤오시엔의 차이와 동일성은 모순 같지만 같은 지점에 놓여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두 영화는 세월을 넘어 가족을 그리고 있고 영화 속의 두 부모님들은 여전히 자식들과 노리코, 요코를 부모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세월을 넘은 그들의 차이 일 수도 있으며 자식을 바라보는 변하지 않는 부모의 애정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장 큰 차이인 세월의 무게는 그들을 같은 지점에도 혹은 다른 지점에도 놓일 수 있게 한다. 


복잡하고 엇갈리게 스쳐 다니는 현재 동경의 또는 도시의 전철들처럼 우리는 100년이 지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긴 세월의 흐름마저도 무색하게 허샤오시엔은 우리가 잊어버린 것처럼 느끼는 감정들을 오즈의 현신처럼 가슴에 던져 놓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야마모토 사츠오 & 신도 가네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