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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Nov 18. 2020

아무도 모른다.(2004)-고레헤다 히로카즈

그런데 모르지 않으니 슬프다.

  영화가 주는 충격은 아기라 유야의 서늘한 눈빛이 아니다. 이는 잔인하리 만치 정겹게 그려내는 아이들의 삶 그 자체다. 사용할 물이 부족해도 이름없는 풀꽃에 듬뿍 물을 주는 아이들,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해 따돌림을 당해도 선뜻 돈을 위해 어른들의 부정함에 뛰어드는 아이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코레헤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어느 순간 돌출하는 부재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갑자기 자살해 버린 남편[환상의 빛], 삶의 환희의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 림보역의 영혼들[원더풀 라이프]. 그런 이들이 엮어가는 ‘죽음’이란 이름으로 이야기 하는 삶, 이것이 코레헤다 히로카즈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길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부재의 이유가 아닌 부재하지 않음에도 찾지 못하는 관객의 눈을 겨냥한다. 삶이 죽음이란 불가항력적인 원인에 의해 운명처럼 엮이는 것이 아니라, 삶에 존재하는 죽음이라는 관념을 떠나서 버려진 아이들의 아이답지만 아이 같을 수 없는 생존에서 삶을 이야기 한다. 그곳에서 부재하는 것은 앤딩에 올라가는‘YOU’(배우의 이름이긴 하지만)라는 단어, 존재하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 정말 ‘아무도 모른다’는 바로 그것이다.


  영화 속에서 스쳐가는 어른들의 눈은 자신들의 높이에 고정되어 아이를 내려다 본다. 그 시선은 그져 내려다 보고 있는 보듬음의 시선도 아니고 정이 담긴 시선도 아닌 그저 감시의 시선일 뿐이다. 아키라는 그런 어른들의 시선이 무겁다. 절실히 도움이 필요하나 그것을 애기할 곳이 없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키라의 존재가 바로 부재이다. 문득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떠 오른다. 나마자데를 찾는 아마드는 어른들의 허리 아래서 길을 묻고, 어른들은 아마드의 키만큼 높은 위에서 대답한다. 이 맞추어 질수 없는 시선의 차이가 아키라와 동생들이 존재하는 세상 바로 그 모습이다. 그런데도 화면은 그 지독한 계절을, 그 차가움의 동네를 예쁘게 그리고 있다. 평화롭게만 흘러가는 하천이 그리고 아이들을 귀엽게만 바라보는 어른들의 눈이 아키라의 냉정해진 눈빛보다도 더 차갑다. 말 할 수 없고 울 수 없는 아이, 동생의 주검 앞에서도 손만 떨 수 밖에 없는 아이를 바라보며, 이 영화를 통해 할 수 있는 것 혹은 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는 자신이라 느껴질 때, 가슴속에 밀려 오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 그것이다. 감독은 그 모든 것을 아직은 천진해 보이는 아이들의 웃음 위로 비수처럼 꽂는다. 그 아이들은 사랑스럽고 그 보이지 않는 눈높이는 관객에게 맞춰져 있다. 사실적이지 않은 듯한 동화 같은 화면과 사실적으로 망가져가는 아이들의 집. 카메라의 눈이 가져다 주는 죄의식은 오로지 관객들의 몫 인양 스크린 안을 유유히 흐른다.

 


  이 영화는 슬픔 바로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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