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이라 명하고픈 지옥도
이 영화는 지독한 악몽이길 바라는 듯, 아름다운 모니카 벨루치의 평온한 공원에서의 한 때로 끝맺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감독의 한 마디로 이 악몽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추악한 두 늙은이가 적 그리스도에게 하는 고해성사처럼 자신의 악행이 환희일 수도 있다고 자위하는 모습으로 서막을 걷으며 서슬 퍼런 시간의 칼을 휘두른다. 카메라는 도그마 선언을 재 실행하듯 칙칙하고 어두운 혼돈의 공간에서 시작해 그 파멸의 플레임을 만들어내며 스스로도 현실과 꿈을 헤매는듯한 흔들림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여기 시간에 의해 파괴된 평범한 인간들이 있습니다, 라고.
시간의 흐름이란 다음 시간이 오기 위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다는 어느 구절처럼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흔히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회한의 심경을 토로하지만 이미 영화의 초반부터 파괴의 끔찍한 지옥도를 경험하는 관객들은 그러한 심정마저도 잊어버린다. 이 헝크러진 지옥도가 점점 자리를 잡아가며 두 연인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모습을 선망과 질투로 바라보는 또 한 남자의 평화로운 대화를 보여줄 때, 처절한 파국의 그림자가 스며들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의 인간의 무력함은 절대적인 슬픔이다.
<퍼니게임>의 폭력과 <셀레브레이션>의 파괴된 가족의 혼돈이 함께 내재된 듯한 이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은 앞의 영화들 보다 더 충격적인 실험(?)을 펼쳐놓는다. 다시는 평온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이 벌어진 현실은 잔인하게 사람을 파멸시키고 인생의 종지부를 요구한다. 얼굴의 뼈와 피와 피부가 뒤범벅 되게 뭉개지고 모니카 벨루치가 잔인하게 강간을 당하는 기나긴 시간을 지켜보는 스크린 밖의 관객들에게도 피핑 탐이 되어 이 지옥도를 계속 지켜볼 것인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그 자리를 떠나버릴지의 선택을 강요한다. 이미 영화 속에서도 피빛의 생지옥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 너무나 자연스레 스며들어 인지하기 어려운 선택의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인간의 지각으로 그것은 운명일 수 밖에 없다는 구차한 변명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카메라는 '파괴의 신'이 아름다운 두 연인을 시기한 나머지 그들을 선망하는 한 남자를 빌어 자연스럽게 지옥의 문을 두드리게 하고 그 유혹의 남자마저도 이브에게 사과를 권해 영원히 땅을 기어 다니게 된 뱀처럼 잔인한 복수의 칼을 쥐게 한다.
심한 흔들림으로 식별조차 불가능 할 것 같은 화면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더욱 더 잔인한 그림을 상상하게 만들고 그 충격을 오감에 문신처럼 새기는 이 영화는 오로지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러한 표현을 통해 관음증적 본능을 충족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많은 퇴행성 인간들에게 더 이상 쉴 곳 조차 재공 하지 않는 것 같다. 끝임 없이 자극받고 그 자극의 역치가 무뎌질 무렵 또 어떤 충격이 사람들의 감성에 파문을 던질지, 이것을 기대해야 할지 두려워 해야 할지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