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와 삶의 경계에 선 밀양사람 김종찬
영화 속 종찬의 나이는 39살이다. 그리고 39년의 세월을 혼자 살아오던 그는 아이 하나를 데리고 죽은 남편의 고향을 찾아 내려온 서울 여자 이신애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말이 호감이지 그녀에게 ‘지분댄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혼기를 놓친 꽉 찬 나이에 과부를 어떻게 해 보려는 종찬은 아주 속물이다. 아니 속물처럼 보인다.
흔히 이 영화 <밀양>을 구원에 관한 이야기라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삶의 여정이 험난하지 않고 무난하게 흘러가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이고 인간의 평생이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인데, 구원을 바라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 세월을 견디며 살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살면서 이런 의미를 늘 각성하고 살아간다면 아마도 어딘가에 감금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인간은 버티고 살아가려고 종교 같은 것을 찾는 것이고 그토록 절대자에게 매달리는 것 같다.
아들을 잃은 이신애란 여자는 구원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 중에 좀 더 아픈 고통을 가졌다. 그 고통이 극에 이르렀기에, 그녀는 교회에 의탁해 하느님을 의지하고 그 속에서 구원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용서한 적 없는 살인자가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상황은 이신애의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유괴범의 딸이 길거리에서 폭행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외면한 그녀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구원이 착각이었음을, 자신은 고통의 현실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닫는다. 과연 인간에게 말 그대로의 구원이란 가능한 것일까. 이신애의 주변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종교에 의지하고 길거리에서 찬양하며 사람들을 자신의 길로 함께하길 선동한다. 그런 그들은 과연 진실로 구원에 다가서 있는 것일까. 그들 역시도 종교 앞에서 얻는 잠깐의 위안을 그녀처럼 구원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인간의 일생에는 평화도 구원도 없으며 진정한 용서 또한 인간이 평생 할 수 없는 어떤 환상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분노에 찬 인간은 그것을 억누를 뿐 그 분노의 대상을 절대 마음에서 놓아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혼란한 삶 속에서 분노와 두려움과 고통에 뒤엉켜 살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 사이에서 누군가가 그 삶을 지켜봐 줄 수 있다면 혹은 누군가와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고통받는 이의 삶에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구원’은 단어의 의미처럼 신성한 화두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고통을 달래주고 위로를 줄 수 있는 인물이 생활에 완전히 발을 내린 속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김종찬이란 인물이다. 왜 김종찬일까?
김종찬은 척 보기에도 속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김종찬의 성격을 이 영화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종찬과 그 어머니와의 통화다. 여기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종찬의 삶의 방식이 묻어나 있다. 신애 옆을 맴돌고 있는 자신을 열심히 변호하지만 결국 엄마를 설득하지 못해 투정하는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어머니에게 죄스러워하는 종찬의 마음이 분명히 배 있다. 어쩌면 신애란 여인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잣대로 보면 신애의 고통만큼은 아닐지라도 나름 난감한 일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는 그녀의 곁을 맴돈다. 신애의 의지를 거스르지 않으며 자신은 개입하지 않는다, 아니 가만히 기다려 준다. 사랑하는 여자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 고통을 묵묵히 지켜내는 남자, 여기서 되짚어 보면 김종찬이란 인물은 현실을 포장한 가장 판타지 같은 인물이다. 어쩌면 그는 영화 속에서 속물이라 가장하는 위악적인 모습을 가진 듯하다. 그 역시 신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삶은 그렇게 현실 같은 옷을 껴입고 거짓된 판타지 안에서만 영위가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신애는 종교에 맞서, 아니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신에 맞서 밑바닥을 향해 자신을 내리꽂는다. 위태로운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그 속에서 가장 힘들고 아픈 곳으로 그녀는 자신을 하염없이 끌고 간다. 그렇게 자신을 놓아버리는 그녀 옆에는 결국 구원도 아니고 용서도 아닌 삶에 단단히 발을 내린 속물 같은 김종찬이 서 있으므로써 그녀는 그 걸음을 늦춘다. 신애가 고통을 조금이나마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들고, 결국 아무것도 용서하지 못하지만 이웃 아줌마와 어이없이 웃는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마당 한구석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은 속물처럼 하지만 그렇게라도 종찬과 마주 보고 서 있는 그 모습이 살아갈 수 있는 위안이며 어쩌면 신의 뜻이리라 결론 내리는 듯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종교의 폐단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를 통한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사는 거 별거가 있나?”,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란 어른들의 흔한 말이 생각난다. 삶은 늘 그대를 속인다. 그래도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