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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Nov 20. 2020

<밀양>(2007) - 이창동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구원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종찬의 나이는 39살 이다. 그리고 그 39년이란 세월을 혼자 살아오다가 아이를 하나 데리고 죽은 남편의 고향을 찾아 내려온 서울 여자 이신애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말이 호감이지 그녀에게 지분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혼기를 놓친 꽉 찬 나이에 과부를 어떻게 해 보려는 종찬은 아주 속물이다. 아니 속물처럼 보인다.


 영화 <밀양>은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살아가는 길이 험난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어차피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이고 평생이란 죽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데 구원을 바라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월을 견디며 살아낼 수 있을까, 죽을 때까지. 하지만 살면서 이런 것들을 늘 염두 해두고 산다면 아마도 어딘가에 감금되어 살지도 모른다. 사람이니까 어딘가에 감금되지 않으려고 종교라는 것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인간이 신에게 그렇게 매달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영화는 종교의 폐단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를 통한 구원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런 저런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신애란 여자는 그 많은 타인들 보다 더 아픈 고통을 격은 또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다. 그 고통이 극에 이르렀기에 그녀는 하느님을 의지하고 그 속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고 또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들을 죽인 범인의 딸이 길거리에서 폭행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외면한 그녀는 그 구원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마도 종교에 의지하는 많은 사람들, 영화처럼 길거리에서 찬양하고 선동하는 그 사람들도 구원에 다가서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다만 구원이라 착각하는 잠깐의 위안 정도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살아가는 것에는 평화도 없고 구원도 없고 그저 삶만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삶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자신이 살고 있고 그 속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닌 타인도 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어느 순간, 삶이라는 단어의 의미에만 얽매이지 않는 사는 것 자체가 위안일 수 있는 때가 올 수 있지 않을까? ‘용서’라는 화두는 아마도 인간이 평생 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어떤 환상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분노에 차 있으면 인간은 그것을 억누를 뿐 완전한 해결이랄 있을 수 없고 그 분노의 상대를 절대 마음에서 놓아줄 수 없을 것이다. 신이 아닌 이상 그리고 신은 선악과를 인간이 먹지 않길 원했으므로 늘 혼란 속에서 살고 분노와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 끼리 소통하는 것, 이해가 아니더라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거창한 구원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삶의 위안이 될 것이다. 이 영화에서 고통을 벗어날 작은 위안의 모습을 가진 것은 바로 생활에 완전히 발을 내린 속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김종찬이란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김종찬일까?


 김종찬은 척 보기에도 속물이고 이신애는 필름2.0에 김영진 평론가의 말처럼 자기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하는 더 속물이다. 이 영화에서 김종찬의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규정짓는 에피소드는 종찬이 전화로 하는 어미니와의 대화이다. 여기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종찬의 삶의 방식이 가장 잘 묻어나 있다. 신애 옆을 맴돌고 있는 자신의 살아가는 행동들을 설명하면서 또 설득하지 못해 결국 투정하듯 말하는 하지만 그 속에는 어머니에게 죄스러워하는 마음이 분명히 배어 있다. 신애란 여인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잣대로 보면 신애의 고통만큼은 아닐지라도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는 그녀의 곁을 맴돌며 지켜준다. 신애가 하자는 그대로 하면서 자신은 개입하지 않는다. 지켜봐 주는 것, 사랑하는 여자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 고통을 묵묵히 지켜내는 남자. 여기서 다시 되짚어 보면 김종찬이란 인물은 가장 현실적이라는 포장을 입은 판타지와 같은 인물이다. 어쩌면 이 종찬이란 인물이 영화 속에서 가장 위악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은 그렇게 현실 같은 옷을 껴입고 거짓된 판타지 안에서만 영위가 가능한 것일까?


 어른들이 늘 하시는 말씀들, "사는 거 별거 있나?”,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란 말이 생각난다.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며 세상이 변하는 속도에 나를 맞추어 가는 팍팍한 현실 속에서 일주일에 단 하루, 그 생활을 그냥 팽개치고 구원을 하루 종일 외치고 나면 그 다음은 어김없이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삶에 속물 같은 김종찬이 서 있으므로 해서 그냥 살아지게 아니 한 번 더 살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신애가 고통을 조금이나마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들고, 아직은 용서하지 못하고, 하지만 이웃의 아줌마와 어이없이 웃는 바로 그러한 모습들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마당 한 구석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이 신의 뜻이든 인간의 뜻이든 속물처럼 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위안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삶은 늘 그대들을 속인다. 그래도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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