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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Nov 24. 2020

<시>(2010) - 이창동

 중요한 것은 '시'라는 것, 혹은 시상이라는 것은 비단 아름다운 것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는 언어의 유희다. 무한히 고르고 골라서 정류해낸 언어의 배치를 통해 오는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우리는 이 '시'라는 것을 자살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힐 것 같던 한 평범한 소녀의 시신이 한스러운 이 세상을 향해 돌진하듯 떠내려 오는 무참한 모습, 산발로 흩어진 그 머리 옆에 떠오르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참혹한 모습으로 만나기 시작한다.


 여중생의 시신은 시를 쓰기 위해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한 미자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고 마지막을 향하게 한다. 그녀는 영화 시작에 이미 사형선고와도 같은 알츠하이머병으로 의심을 받으며 관객들과 함께 세상에 내던져진다. 시를 쓰기 위해 그녀가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보려고 노력할수록 그녀는 세상의 무심함에 덮여버린 잔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미자가 완성하는 시는 그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본다는 얄팍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세상의 감추어진 추함과 그 속에서 고통받은 영혼에 대한 진혼이자 윤리를 덮어버리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한 단죄이다. 그녀의 시가 완성될 때쯤 그녀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잔다르크 같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왜 '시'이며 왜 알츠하이머가 발병한 미자 할머니여야 하는가.


 사람들은 이익, 특히 자식의 그것에 생각이 도달하게 되면 이성이라는 장치가 존재하긴 하는가 싶게 마비돼 버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양쪽 눈을 앞으로만 향하게 하고 목표만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와도 같다. 하지만 미자는 결국 손자를 경찰에 넘기고 만다. 자식에게는 매를 들어도 손자에게는 그렇지 못한다는 어르신들을 말씀을 뒤로하고라도 손자를 보면 자신으로부터 뻗어 나온 근본이라는 의식을 가장 강하게 느끼게 된다고들 하는데 극 중 미자는 합의금마저 갚은 상황에서 한 소녀의 삶을 유린해 버린 손자를 경찰에 보내고 만다. 미자 스스로가 세상에서 잊혀 버릴지도 모를 그 비극을 등에 지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극 중에서 시를 강의하는 김용탁 시인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냐고 질문하는 미자를 향해 사물을 보고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시상은 저절로 찾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미자의 눈에 보이는 사물은 보는 것만으로 그리고 그 시각을 통해 머리로 전달된 것만으로는 그녀의 병으로 인해 한낱 가물거리는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 다들 눈으로 보기만 하던 세상을 스스로 체화하기 시작한다. 눈앞의 사과는 보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고 땅에 떨어진 살구는 스스로를 땅에 던져 다시금 새로운 생명을 재구성해 내며 절정의 맛을 보여준다. 살구의 진실은 바로 그 보이는 아름다움만 쫒아가던 미자의 시와 그녀의 삶이 바로 죽은 아이를 두껍게 묻어버린 현실의 견고한 고통 위에 서 있었음을 사람이 가장 추악하게 변해간다는 병의 발호에 의해서 알게 된다. 결국 죽은 희진을 몸소 체화해낸 그녀는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모든 진실을 외면해 버린 소년들의 아버지들과 얄팍한 자기 연민에 가득 찬 시낭송회의 사람들 그리고 결국 한 편의 시도 완성해 내지 못하는 강의를 함께 듣던 사람들 사이에서 찾을 수 없는 그녀 자신으로 체화된 '시'와 함께 스스로를 소멸시킨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화가 난다. 어쩌면 일상일지도 모를 스멀스멀 드러나는 만연한 폭력적인 만남들과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해온 희진, 그리고 그 희진을 몸소 체화한 미자. 그 주변에는 그 모든 상황의 근본을 만들어 내는 남성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참혹한 죽음 앞에서 결코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하지 못한 그것들을 한 때 삶이 꽤나 퍽퍽했을 것 같지만 다소 소녀스럽고 또한 엉뚱한 할머니인 미자, 결국 노년을 그 어느 노인들처럼 제가 한 딸을 위해 그 손자를 힘겹게 키워내는 그들의 어머니를 그 부당함 속으로 끌어넣는다. 그러한 그들에게 속죄의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자의 '시'는 그 누구도 물으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폭력의 희생자인 죽은 희진에 대한 애도이며 그 희진을 몸소 체화하고 단죄하는 그녀 스스로에 대한 애도이다. 영화의 본류를 벗어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밀양>에서 종찬같은 인물을 만들어낸 이창동 감독이 너무나 힘없고 미혹한 '미자 할머니'에게 지우는 짐이 너무 가혹하고 그 상황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무섭게 냉혹하고 도덕적으로 무기력하다. 이렇게 '미자'할머니는 영화 속에서 소멸되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이 영화를 구원이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무섭고 피곤하다. 언제까지 그 모든 모순과 속죄를 이렇게 힘없는 가여운 할머니 미자에게 던져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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